CHAPTER 3_행복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시대를 뛰어넘다.
(Epigraph) 문 위의 표지판에서는 “성인 발달에 관한 그랜트 연구”라고 적혀 있었다. …. 그날 오후, 나는 대학 2학년생으로 열아홉 살이었다. 대공황과 6개월에 걸친 소아마비 투병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들만 없었다면 만족하고 활기찰 수도 있었던 인생의 출발이었다.
이 장에서는 그랜트 연구의 75년 세월을 기록한다.
그랜트 연구의 프로그램은 1938년에서 1954년까지는 클라크 히스(Clark Heath) 박사가, 1954년에서 1972년까지는 찰스 맥아더 박사가, 1972년에서 2004년까지는 내가 이끌었고, 2005년부터는 로버트 웰딩거 박사가 이끌고 있다.
1936~1937학년도에 알렌 V. 복 박사(Arlen V. Bock, M.D.)는 하버드 대학교 공중위생학부의 교수로 학생건강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복은 제임스 코넌트 총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공중위생학부의 업무 영역과 학내 의사의 역할을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으며 그 첫 단계로 건강한 젊은 남학생을 대상으로 과학적인 연구를 할 것은 제안했다. 복은 건강이란 무엇인가에 가장 큰 관심이 있었다.
[1] 복은 코넌트 총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현대 생활의 억압으로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언급하면서 “오늘날 학생 세대는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이 이러한 억압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하버드 대학교 공중위생학부의 임무는 관례적으로 해오던 일이 나닌 다른 일에 중점을 두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는 날로 복잡해지고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잘 대비할 필요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표를 위해 복은 친구이자 환자였던 윌리엄 T. 그랜트라는 연쇄점 부호의 이름을 딴 연구 계획안을 제출했다. 1937년 1월, 곧 설립될 그랜트 재단의 근간이 된 6만 달러가 도착했고, 코넌트 총장과 교수협의회는 복이 제안한 연구 계획안을 승인했다.
그랜트 연구는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교 종단 연구’로 불리다가 얼마 후 ‘사회 적응에 관한 하버드 대학교 그랜트 연구’로 알려졌다. (이 이름은 재정 지원자 그랜트의 주요 관심사인 사업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랜트는 좋은 매장 경영인을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1947년 그랜트가 재정 지원을 멈춘 뒤에는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랜트 연구는 1938년 가을, 케임브리지의 홀리요크가에 있는 작은 붉은 벽돌 건물에서 출발했다. 이 연구의 목표가 학제적인 성격을 띠었으므로 초기 연구팀은 내과 의사, 심리학자, 자연인류학자, 정신과 의사, 사례 연구자, 2명의 비서로 구성되었다. 하버드 대학교 <크림슨 Crimson>지 편집자 댄 펜 주니어(Dan Fenn, Jr.)는 8명의 개척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3] “하버드 대학이 진행하는 연구 중 ‘정상적인’ 사람을 분석하는 이 연구는 언젠가 사회에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다. … 이 연구는 대상자가 사회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도록 쉽고 바르게 안내하는 공식을 끌어낼 것이다.
1938년 하버드 대학은 회의를 개최함과 동시에 그랜트 연구의 시작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연구의 형성에 나름 깊이 관여한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 정신의학부 초대 학장이자 그랜트 연구의 강력한 지원자로 새롭게 참여한 애덜프 메이어(Adolf Meyer)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4] 메이어는 정신의학 연구가 살아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명하지만 대중적인 성공은 얻지 못했던 “인생 도표Life chart”의 가치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동료 정신과 의사와 함께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보편적 문제에 대한 논의보다는 세밀한 관찰 기록이 더 필요하다. 특히 이 기록들은 …. 인간 생애 전반에 대한 기록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환자들의 정신적 삶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한다고 호소했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생리학자인 윌터 캐넌(Walter Cannon)도 회의에 참석했다. 캐넌은 메이어와 마찬가지로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역할 모델이 된 사람이다.
[5] 싸움 혹은 도주(fight or flight) 반응 개념을 체계화한 사람도 다름 아닌 캐넌으로,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생리적 항상성(physiological homeostasis)에 관한 고전적 논문인 <지혜로운 몸 The Wisdom of the Body>을 집필했다.
생리적 항상성은 그랜트 연구가 멈추기 않고 관심을 기울여온 분야이다.
[6] 그리고 나는 캐넌 교수에 대한 존경을 담아 내 책의 제목도 <지혜로운 자아 The Wisdom of The Ego>라고 지었다.
제임스 코넌트 총장도 참석했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민간 행정요원으로 일했다. 그는 당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알리 복도 회의 자리에 있었다.
[7] 알렌 버논 복은 한때 <하버드 가제트 Harvard Gazette>지에서 “금발에, 활발하고, 퉁명스럽고, 유순하고, 호전적이고, 언제나 바쁜 사람”이라는 역설적 평을 받은 의사였다.
복과 그의 동료 존 W. 톰슨(회의에 참석함)은 정상적인 사람의 생리에 관한 연구 분야에서 선구자들이었으며, 1926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피로 연구소 Harvard Fatigue Laboratory’의 설립을 도왔다.
생리학자, 생물학자, 화학자들이 모여 신체적 스트레스에 어떻게 적응하는지에 관해 연구하던 그곳에서는 탈의실 벤치를 밝고 오르내리는 실험 방법을 개발했다.
[8]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심장 기능 검진 방법 가운데 하나로 쓰이고 있다.
이 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통해 미국 공군은 고공 폭격기에 산소 보조기를 장착하는 결정을 내렸다.
복은 그랜트 연구가 출범한 뒤에도 피로 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심은 평균적인 건강 상태가 아닌 최적의 건강 상태를 밝혀내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당시에는 엘리트 남성을 선정해 조사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랜트 연구는 그렇게 했다.
1. 그랜트 연구의 개척자들
1938년에서 1954년까지 책임자였던 클라크 히스 박사는 주목받는 과학자였다.
연구 초기를 보면 클라크 히스가 얼마나 따듯하고 자상하게 환자를 대했는지 알 수 있다.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구에 참여할 때마다 히스는 2시간 동안 꼼꼼히 그들의 신체 상태를 점검했다. 이는 그랜트 연구가 통상적으로 조사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루이스 그레고리는 연구 대상자와 그들의 가족을 면담하는 사회 조사원이다. 그 덕분에 그랜트 연구는 대상자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가장 적은 연구가 되었다. 그가 한 일은 대상자가 연구에 참여하면 그들의 가정사를 꼼꼼히 기록하고 그들의 부모를 면담하는 일이었다. 그는 전역을 누볐으며 상세한 정보를 얻어냈다. 가족 면담에서 그레고리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했으며 그녀의 접근 방식은 대상자들은 그랜트 연구와 결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생활사에서 병적인 세부 사항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큰 의미가 있다는 점을 뜻했다.
윌리엄 T. 그랜트는 연구 설림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가 알리 복에게 첫 번째 연구비를 지원한 것은 1937년이 되어서였다. 알리와 그랜트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복은 최적의 건강 상태를 가진 미국인을 연구하여 미군 안에서 더 유능한 장교를 선발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반면, 그랜트는 거대한 연쇄점으로 성장한 자신의 기업에서 유능한 매장 관리자를 뽑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를 바랐다. 두 사람은 최고로 유능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했던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러나 그랜트는 당시 체형 의학에 몰두해있던 연구자들 보다 사회적, 감성적 지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랜트 연구의 수석 심리학자 프레더릭 리먼 웰스 박사(Frederic Lyman Wells Ph.D)는 계량 심리학자로, 1차 대전 당시 주요 지능 분류시험이었던 사병 지능검사(Army Alpha Tests)를 개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9] 그는 그랜트 연구에서 대상자의 성격 구성, 흥미, 소질, 지능을 요약하는 일을 담당했다.
칼 셀처 박사(Carl Seltzer Ph.D)는 젊은 자연인류학자로 체형의학의 옹호론자였으며, 특히 체형과 성격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존 톰슨 박사(John W. Thompson Ph.D)는 스코틀렌드 출신으로 복과 함께 피로 연구소를 설립한 인물이다. 루시엔 브로하 박사(Lucien Brouha Ph.D)는 초기 그랜트 연구에서 생리학자로 일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1943년 당시에는 사망했으며 피로연구소에 대한 재정 지원은 1944년에 끊겼다.
그랜트 연구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들은 연구 대상자 한사람마다 약 10시간을 들려 폭넓은 면담을 진행했다. 초기 연구 단계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 다섯 명 가운데 아무도 3년 이상을 근무하지 않았다. 미네소타 대학교의 정신의학부 부장을 지낸 도널드 헤이스팅스(Donald Hastings)와 케이스웨스턴리저브 의과 대학 학장을 지낸 더글러스 본드(Douglas Bond)가 그들이다. 정신과 의사 윌리엄 우즈(William Woods, 1942~45), 존 플루머펠트(John Flumerfelt, 1940~41), 그리고 토머스 라이트(Thomas Wright, 1937~40) 또한 그랜트 연구 초기에 면담을 주도한 정신과 의사들이었다.
[10] 우즈는 또한 초기 그랜트 연구의 많은 부분에서 토대가 되었던 26개의 성격 특징 평가를 담당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기의 연구자 선정과 실행 과정은 성격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네 사람의 업적을 반영하지 않았다. 하인즈 하트만, 안나 프로이트, 에릭 에릭슨, 해리 스택 설리번은 모두 인간의 성격 형성에 관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을 밝혀낸 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랜트 연구는 1967년이 되어서야 인간의 심리적 대응 방법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 생물학에서 심리학으로
그랜트 연구가 출범한 뒤 10년 동안은 생물학에 근거한 이론이 주를 이루었다. 1938년에는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체형과 우생학적 유전 요인이 환경적 요인보다 더 많은 잠재적 영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리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해리 할로우(Harry Harlow)는 다른 개체와 결핍된 관계를 맺는 원숭이를 혁신적으로 연구해 명성을 얻었다. 1958년 미국심리학회 회장직 수락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개탄했다.
[11] “심리학자들은 사랑과 애정의 기원과 발달에 관해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옥시토신과 거울 뉴런, 대뇌 변연계의 모성애착에 의해 영향을 받는 관계 속에 살아간다는 생각은 그랜트 연구 초기 10년 동안은 심리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12] 독일의 정신의학자 에르네스트 크레치머(Ernest Kretchmer)는 체형과 성격의 관계를 연구하여 1929년 노벨 의학상 후보자가 되었다.
그의 이론에 매료된 당시 연구원들은 성격이 세 가지 체형, 즉, 마르고 약한 외배엽형, 강하고 근육질인 중배엽형, 부드럽고 통통한 내배엽형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초기 그들의 생물학적 결정론은 우리에게는 인종차별적 견해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에는 이런 생각을 대체할만한 패러다임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들이 파시즘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3.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하버드 대학교 2학년생으로 대부분 19세였다. 총 268명 가운데 64명은 1939년, 1940년, 1941년 졸업자이고, 204명은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졸업한 2학년생 가운데 더 체계적인 선발 과정을 거쳐 뽑힌 7~8퍼센트의 학생들이었다.
약 10퍼센트의 대상자는 우연히 연구에 참여했다. 자원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이미 연구에 참여한 대상자의 동생도 있었고, 학생 지원관이 추천한 학생도 있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선정 기준이 매년 조금씩 바뀌면서 다소 체계적이지 못한 계획 아래 선발되었다.
첫 단계에서는 연구자들이 새로운 학생들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서 졸업하지 못할 것 같은 학생들을 걸러냈다. 학생의 SAT 점수와 평균 학점을 선발 기준으로 삼았으며, 선천적 능력에 대한 관찰 기록도 살펴보았다. 보통 SAT점수여도 고교 시절 학생회장을 지닌 학생들이, SAT 점수는 높지만 학급 활동 참여도가 낮은 학생보다 선호되었다. 이러한 선발 기준으로 동기생 가운데 40퍼센트의 학생들을 걸러냈다.
의료적, 심리적 질병이 있는 30퍼센트도 제외했다. 남은 학생 약 300명의 명단을 학과장에게 보고했고, 학과장은 그들 가운데 “건강한” 학생이라고 생각되는 100명을 선발했다. 이는 본질적으로 학과장들이 과외 활동과 신입생 때 운동 경기에 참여한 학생들을 선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 모든 비용을 학교 측에서 제공받는 재능 있는 국비 장학생들도 대상자로 뽑았다. 이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생활에서 서투른 모습을 보였지만, 오로지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잠재성 때문에 선정되었다.
선발된 2학년생 90명 중 가운데 5명 중 1명꼴로 여러 가지 이유로 연구에 참여하지 못했다. 1942년에서 44년 졸업자 중 해마다 70명 정도가 추가로 참여하면서 하버드 집단 대상자는 268명이 되었다.
그랜트 연구는 의도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은 남학생들을 선발했다.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은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표 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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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사건 |
역사적 / 대중적 사건 |
1919 ~ 1922 |
출생 |
1차 대전 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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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참정권 확보 |
1923 ~ 1929 |
아동기 |
광란의 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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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세대의 부의 축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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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변 훈련에 대한 엄격한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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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가 병을 퍼뜨린다는 공포 퍼짐 |
1930 ~ 1940 |
사춘기 |
대공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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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세대의 경제적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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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주의와 평화주의의 시대 |
1941 ~ 1945 |
대학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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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 |
2차 세계대전 |
1946 ~ 1960 |
결혼 |
제대군인원호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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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추란 |
미국 달러의 강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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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불안 |
급격한 경제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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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집권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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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적인 기업 문화의 시대 |
1961 ~ 1975 |
직업적 안정 |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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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떠남 |
담배의 해로운 영향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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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성인의 삶 영위 |
시민권과 의료 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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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달러의 약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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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
1990 ~ 2010 |
은퇴 |
클린턴과 부시의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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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악화 |
이라크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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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보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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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자들은 사병지능검사를 받았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일반 대중의 상위 3퍼센트에 해당하는 IQ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SAT 점수는 대학 입학을 앞둔 고교 졸업생 성적의 상위 5 ~ 10퍼센트에 속했으나, 다른 유능한 대학생들의 성적보다 월등하지는 않았다.
평균적으로 이들은 미국에 정착한 조상의 5대손 이었다. 흑인은 없었다. 10퍼센트는 가톨릭, 10퍼센트는 유대교도, 나머지 80퍼센트는 개신교도였다. 89퍼센트가 메이슨 딕 라인(Mason-Dixon Line, 미국의 남/북부를 가르는 감정적인 경계선) 북쪽과 미주리 주 동쪽 출신이었다. 이들중 절반은 사교육을 받았으나 장학금 대상자였다. 대상자 3분의 1의 아버지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50퍼센트의 아버지는 대학 졸업장이 없었다. 그리고 11퍼센트의 어머니만이 직업을 가졌으며, 일하는 어머니의 대부분은 편모였다. 32명의 일하는 어머니 중 2명은 작가, 5명은 학교 교사, 1명은 예술가, 1명은 변호사였으며, 나머지는 비서나 음식점 종업원이었다.
루이스 그레고리는 가정 방문 면담을 한 뒤 주관적 기준으로 가정환경을 분류했다. 16퍼센트의 가정은 상위계층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대공황 중에도 여러 채의 집과 자동차와 가정부를 거느리고 살았다. 그들의 1인당 연 소득은 2009년 화폐가치로 평균 22만 5000달러였으며 여기서 1인당은 가족구성원 1명을 말한다. 4퍼센트의 가정은 하위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의 1인당 연 소득은 2009년 화폐가치로 5200달러였다. 이런 것을 보면 대상자들이 모두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라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신 성분이야 어떻든 하버드 대학교 졸업장은 상위 중산층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의미했다. 1940년대에 하버드를 졸업한 학생들의 대다수는 더 나은 삶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고, 대부분은 그들의 아버지보다 성공했다.
4. 초기 자료의 분석 방법
연구팀 정신과 의사, 클라크 히스, 루이스 그레고리 세 사람이 각 대상자를 면담했다. 히스 박사는 2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대상자의 신체 건강 상태와 식습관, 병력,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을 조사했다.
[13] 나머지 조사원이었던 자연인류학자 칼 셀처는 대상자의 인종(북유럽, 지중해 인종 등으로 분류), 체형(내배엽, 외배엽, 중배엽형)을 기록하여 체형이 “남성형”인지 “여성형”인지에 관해 철저히 검사했다.
조사원들은 주요 장기의 기능부터 눈썹의 굴곡 모양, 점, 그리고 고환이 늘어진 길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에 주목했다. 또한 커피나 차에 설당을 몇 숟가락 넣는지와 같은 식습관도 조사했다.
이런 기록의 이유는 당시 학계를 지배한 자연인류학 이론을 반영하려는 잘못된 노력이었다.
[14] 외배엽형 체형은 정신분열증 기질, 중배엽형은 낙천적인 기질, 그리고 내배엽형 체형은 조울증 기질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8회~10회까지 진행한 1시간짜리 정신의학 면담에서는 대상자의 가족, 가치관, 종교 활동,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대상자들을 환자가 아닌 일반적인 건강한 사람으로서 알고자 했다. 이들은 대상자들의 병증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을 정신 역학적으로도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면담을 진행한 의사들은 성장기의 성적 발달에 관한 이력에 대해 묻긴 했으나 불행히도 그들의 가까운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프레더릭 웰스(Frederic Wells)는 그랜트 연구의 심리학자로 선천적 지능검사(육군언어능력검사와 육군수리능력검사)를 담당했다. 여러 사례에서 그는 언어연상검사와 간단한 로르샤흐 검사를 했다. 이 검사들은 무의식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상력을 검사하기 위해했다.
[13] 공간 관계에 대한 이해도와 손놀림의 능숙한 정도를 평가하기 위한 하버드 대학교 블록조합검사도 실시했다.
생리학자 루시엔 브로하는 피로 연구에서 각각의 대상자를 연구했다. 브로하는 각 대상자의 호흡기 기능을 측정하고 대상자가 8.6도로 기울어진 트레드밀에서 시간당 7마일의 속도로 5분 동안 달릴 때 또는 지칠 때까지 달릴 때 생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는지 알아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50년도 지난 2000년에 트레드밀 실험을 견딘 정도가 신체의 건강 상태보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이루는 데 더 많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40년 그랜트 연구는 2400달러를 정신신체의학에 호의적이었던 메이시 재단으로부터 받았다. 뜻밖에도 얻은 기부금은 막 등장했던, 지금 생각하면 원시적인 단일 채널 방식의 뇌전도 측정기를 구입하는데 쓰였다. 그랜트 연구에서는 경험 많은 범죄필적학자를 고용해 대상자들의 필적을 조사했다. 뇌전도 검사 결과도 필적 조사도 대상자의 성격을 예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1938 ~ 1945년 |
8 ~ 10회의 정신과적 면담 |
히스 박사가 실시한 철저한 신체검사 |
히스 박사와 그레고리의 면담 조사: 그레고리의 가정 방문 면담 |
인류학적 검사와 생리적 검사 |
뇌파 검사, 로르샤흐 검사, 필적 분석(대상자 상당수를 검사함) |
웰스 박사의 철저한 심리측정 검사 및 투영검사 |
우즈 박사가 만든 26가지 특징에 따른 성격 분류 (부록 E 참조) |
그레고리에 의한 아동기 환경 평가 (I-3) |
21세에 대학 적응(건강) 능력에 대한 ABC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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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1950년 |
몽스 박사가 실시한 대상자들의 전투 경험에 관한 심문 조사 |
연례 설문 조사 시작 |
사회인류학자 랜티스가 실시한 대상자 부인 면담 |
맥아더 박사에 의한 ‘주제통각검사’ |
모든 연구원이 29세가 된 각 대상자에 대해 회의 진행: 인성의 건강도를 ABCDE 등급으로 분류 후 장래 적응도를 판단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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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1967년 |
약 2년마다 설문조사 : 약간의 다른 조사도 있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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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1985년 |
대체로 에바 밀로프스키나 베일런트 박사에 의해 진행된 대상자 전원 대면담 (부록 A 참조) |
45세부터 5년마다 철저한 신체검사 시행, 이 검사는 현재까지 이어짐 |
1~5점까지 객관적인 건강 등급 설정(건강함, 작은 질병이 있음, 고질적 질병이 있음, 병으로 장애가 있음, 사망) |
대상자의 19세 이후 삶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아동기 환경 평가 |
대상자 부인들이 2회에 걸쳐 설문지를 작성한 후 보내옴 |
30~47세 대상자 전원의 직업, 사랑, 여가 활동에 대한 평가 (부록 D 참조) |
적응 대처 방식 (자기도취적, 신경증적, 공감적) 평가 |
우편을 통해 NEO 성격 검사 |
우편을 통해 ‘라자르 인성 목록’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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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2002년 |
대상자 전원 재면담(부록 A 참조) |
49~64세, 65~80세 대상자 전원의 직업, 사랑, 여가 활동 평가 (부록 D 참조) |
대상자 부인과 자식들이 설문지를 작성한 후 보내옴 |
5년마다 이루어진 신체검사 및 2년마다 이루어진 설문 조사가 현재까지 계속됨 |
우편을 통해 ‘갤럽의 긍정적 삶의 원천’ 조사 |
80세 대상자들의 신체 및 정신 건강에 관한 주관적 객관적 조사를 전산화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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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2010년 |
5년마다 이루어지는 신체검사 및 2년마다 이루어지는 설문 조사가 현재까지 계속됨 |
부부 동만 면담 및 대상자 일상 조사 |
80세, 85세, 90세 대상자의 ‘인지 상태에 관한 전화 조사’ (TICS) |
1985~2005sus 대상자의 은퇴기 재면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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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
10종 경기 점수 취합 |
과학의 추는 또 다시 흔들렸고 21세기 초의 유전자 연구는 다시한번 환경학을 지배했다. 그랜트 연구팀은 필적 견본 대신 대상자들의 DNA 견본을 채취했다. 현재 우리는 이 DNA 견본이 미래에 어떻게 사용될지 알 수 없다.
1941년까지 그랜트 연구에서는 대학 2학년 대상자 211명을 조사했다. 대상자 수가 충분한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합의가 이루어진 후 연구원들은 1944년 졸업생 가운데 마지막 대상자 집단을 선발하기로 했다. 이들은 모두 1942년에 대학 2학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68명이 되었다. 1938년에서 1943년 사이 그랜트 재단은 45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러나 그랜트 연구는 방대하게 쌓인 자료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어떻게 거두어들일지 결정해야 했다. 그랜트 재단의 의사들은 그랜트 연구의 초기 성과를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그 뒤 2년 동안 연구원들은 그랜트의 연구의 자료 보관소에서 어떻게든 발표할 만한 자료를 찾아내려고 했다.
1945년 전에는 3개의 논문만을 발표한 (부록 F참조) 연구팀은, 1945년에 그랜트 재단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2개의 논문과, 연구 성과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중 서적을 출판했다.
하버드 대학의 뛰어난 자연인류학자 어니스트 후튼 교수는 글을 매우 잘 썼다. 그리고 그는 체형의학 분야에 확고한 공헌을 했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대해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은 인간 체형에 대한 연구여야 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으며,
[16] 그랜트 연구가 언젠가는 “유전학이나 교배를 통해 개인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초기연구자들을 이렇게 독려한 사람도 후튼이었다.
[17] “전체적으로 ‘정상성 normality’은 ‘강한 남성적 요인’과 공존한다.
[18] 후튼은 그랜트 연구에 대해 소개한 책 <젊은 당신, 당신은 정상이다 Young man, you are normal>를 1945년에 출간했다.
그는 그랜트 연구팀이 제안한 <사회 적응에 관한 그랜트 연구>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그랜트 연구팀과 재단 사이의 불화를 전혀 무마하지 못한 제목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30년 동안 후튼의 책은 그랜트 연구에 관한 주요 저서가 되었다.
[19] 후튼은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다른 관점에서 연구한 인간의 체형이 다양한 성격 특징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는 날에는, 체형이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야 한다.”
[20]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실험을 통해 도출한 증거를 제시하여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환경론자 Crass enviromentalists”라고 내쳐버렸다.
이것은 문제적인 용어였다. 그가 쓴 용어는 오늘날 결정적인 요인으로 생각되는 환경적 고려에 대한 무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전체에 대한 진짜 적대심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문은 그랜트 연구의 책임 연구원 클라크 히스가 쓴 <인간은 무엇인가 What people Are> 였다.
[21] 히스의 책도 인체 계측과, 연구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정신과 의사 윌리엄 우즈가 고안한 검증되지 않은 성격 특성 분류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우즈의 분류법 (부록 E 참조)은 대상자들이 가진 26개의 성격 특징을 이분법적으로 평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와 체형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 설득력 있는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랜트 연구가 서둘러 출간한 두 논문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과학이 환경결정론으로 옮겨가는 조류를 막지도 못했다. 이후 체형에 따른 성격 분류는 다른 독립적 평가들과 비교했을 때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우즈가 만든 대부분의 성격 특성 평가 분류법도 마찬가지로 실효성이 없다고 증명되었다. 심지어 당시에 관련 있다고 말한 어떤 증거도 설득력이 없었다.
초기 연구자들의 업적을 무의미한 일이라고 성급하게 재단하기 전에 당시의 통계방법론의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는 일목요연하게 통계 자료를 만들어내는 컴퓨터가 없었다. 연구원들은 일일이 손으로 적어 넣었다. 20세기 말 컴퓨터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연구팀이 힘들게 뿌려놓은 씨들이 마침내 열매는 맺은 거도 초기 연구팀의 감내한 힘겨운 노력 덕분이었다.
5. 초기 연구 결과와 수정
2차 대전이라는 유령 때문에 그랜트 연구의 관심은 연구 성과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쪽으로 흘렀는데, 특히 유능한 장교가 될 잠재력을 가진 사람을 알아내어 적당한 임무에 배치하는 쪽으로 흘렀다.
[22] 존 몽스는 내과 전문의로서 1946년에 연구팀에 합류하여 대상자들이 2차 대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관해 연구했고,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연구 논문인 <2차 대전 중의 하버드 집단>을 발표했다.
몽스는 우즈의 성격 특성에 관한 연구를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으로 생각하여, 이를 장교로서 필요한 바람직한 특성을 알아내는 데 이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2010년에 새로 나온 실험적 후속 연구는, 촉망 받는 변인이었던 남성적 체형, 잘 통합된 성격, 활발함이나, 촉망받지 못한 변인인 목적의식과 가치 결여, 수줍음 같은 변인이 대상자의 군대 내 계급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군대에서 높은 계급에 오른 대상자는 정치적인 성격 특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낮은 계급에 머무른 대상자는 문화적, 창조적이고 직관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즈의 예상 분류표는 다른 일반적인 문제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가 말한 성격 특성은 2010년에 발표한 노년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10종 경기 종목 가운데 어떤 종목과도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었으며, 오직 하나의 특성만이 3개 이상의 종목과 뚜렷한 상관관계를 드러냈다. 잘 통합된 성격(“변함없음, 의지할만함, 꼼꼼함, 진지함, 신뢰할 수 있음”으로 정의됨)을 가진 사람은 10종 경기 종목 가운데 8개 종목과 관련성이 있었고, 이 성향은 지난 25년간 우리의 자료 분석에서 안정적 변인이 되었다.
[23] 잘 통합되어 있다는 것은 젊은 남자가 “직업 선택, 경쟁적 환경, 도덕적/종교적 태도에서 닥치는 문제들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60퍼센트의 대상자가 잘 통합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15퍼센트의 대상자는 통합이 불완전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후자는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었고 “변덕스럽고, 신뢰할 수 없고, 돌발적이고, 의지할 수 없고,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고, 정돈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잘 통합된 사람은 통합이 불완전한 사람보다 50년 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비율이 4배 더 높았으며 2012년 밝혀진 바에는 평균 수명도 7년 더 길었다. 이와 견주어 초기 연구자들이 긍정적 삶을 이끄는 지표라 여겼던 활발한 성격과 사교적인 성격은 처음 10년이 지나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6. 그랜트 연구에 닥친 재정 위기
[24] 윌리엄 그랜트는 1944년에 복에게 쓴 편지에서 “이처럼 불신과 경멸과 한통속이 되고 외부 인사를 배제한 협력연구는 본 적이 없다”고 비난했다.
돌이켜보면 그랜트 연구팀의 구성원 중 누구도 종단 연구에는 한계가 있고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클라크 히스가 뛰어난 사람이긴 했지만 연구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는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얄궂게도 연구팀에는 미래에 조직을 잘 이끌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도널드 헤이스팅스(Donald Hestings)다.
[25] 헤이스팅스는 1958년 미네소타 의과 대학 정신과학과장으로 일할 때 신경증 외래 환자에 관한 뛰어난 첫 번째 종단 연구 가운데 하나를 진행한 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일 뒤 재단 측은 약 20년 동안 지원을 끊어버렸다. 당시 막 설립된 그랜트 재단에는 의사나 의학 분야 연구자 출신 이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랜트 연구가 수행하던 종단 연구의 한계나 가능성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연구 성과물이 정기적으로 출간되어 나올 때에도(부록 F 참조), 연구팀 학자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얽매여 학회지에 논문을 올리기 위해 매우 편협한 주제를 선정했다.
반면 그랜트, 복, 히스가 뿌린 씨앗은 수십 년이 흘러 열매를 맺었다. 예를 들자면, 우즈가 직관적으로 도출해낸 성격 특성이 있었기에 우리는 대상자들의 향후 50년 동안의 정치 성향을 예견할 수 있었다.
[26] 그리고 40년 뒤, 몽스가 종전 후 돌아온 대상자들의 전투 경험에 대해 정리해둔 덕에 우리는 외상 후 장애의 선행 증상에 관한 전 세계에 얼마 없는 전향적 연구 결과를 확보할 수 있었다.
7. 2차 대전 후의 그랜트
2차 대전은 서양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계에도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전쟁의 결과로 후튼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했던 유전 결정론과 생물학적 결정론이 사회과학계에서 사라졌다. 이는 나치가 우생학을 민족주의에 대한 정당성 확보의 근거로 사용된 것도 한몫했다. 전쟁 중에는 검열 제도 때문에 그랜트 연구팀은 V 우편(2차 대전 중 해외의 미국 장병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보낸 것)으로 대상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 연구팀은 1년마다 정기적으로 설문지를 보냈다.
설문지는 많은 질문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언어능력이 얼마나 높은지 알아보려 했다.
[27] 설문 조사에서는 고용 상태, 건강 상태, 습관(휴가, 좋아하는 운동, 음주, 흡연), 정치관,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특히 결혼 생활의 만족도에 대해 물었다.
1948년 까지 그랜트재단은 연구비 지원이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록펠러 재단의 앨런 그레그가 그랜트 연구에서 일하는 문화인류학자의 월급을 지원했다. 복과 연구팀 직원들은 동료들 그리고 그레그와 상의한 뒤 그랜트 연구의 이름을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혼란을 막기 위해 대상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설문지에는 전과 같이 “그랜트 연구”라고 썻다.
문화 차이를 구별하고 보존하고 연구하는 분야의 전문가였던 문화인류학자 매거릿 랜티스가 연구팀에 합류했다. 그녀는 한층 정교한 면담을 했다. 1950년 랜티스는 205명의 대상자들과 부인들을 가정으로 직접 방문하여 면담했다. 나아가 2차대전이 끝나고 10년 안에 그랜트 연구팀이 방문하지 않았던 171명도 방문하여 면담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그들이 처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랜티스는 곧 그랜트 연구의 책임자가 될 사회심리학자 찰스 맥아더와 공조하여 많은 대상자들에게 주제통각검사를 시행했다. 주체통각검사는 전향적 검사로 애정과 인간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사 방법이었다. 당시 이 검사는 임상에서 사용되는 지침이었지, 그 자체로 연구 수단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20년 뒤 1970년대에 투영검사법에는 전문가였으나 다른 연구 결과에는 문외한이었던 심리학자 찰스 뒤세가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에 대한 주체통각검사와 초기에 만든 로르샤흐 검사의 결과를 재검토했다. 투영검사법은 자세한 묘사와 더불어 대상자들이 가진 이미 알려진 성격 특이점을 확인해주었지만, 대상자들의 정신 건강이나 45세가 되었을 때 얼마나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지를 정확히 예측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에 곧 친밀감 형성과 생산성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원으로 발전하는 댄 맥에덤스는 똑같은 주제통각검사를 친밀한 인간관계를 예견하는데 성공적으로 사용하여 학회지에 논문을 올렸다. 그가 세운 친밀감 동기는 행복한 삶의 기초인 두 가지 기준에서 성공할 것인지를 상당히 예견했다.
[28] 좋은 삶의 두 가지 기준은 일과 사랑으로, 종종 프로이트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1953년 하버드 대학교 운영위원회는 그랜트 연구가 추가 재원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더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래서 54년 7월 복과 히스는 슬픈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29] “그랜트 연구에 참여한 모든분들게, 연구소 측은 1954년 7월 1일 현재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의 협조는 저희에게 무한한 만족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
그러나 마지막 고별인사만은 피할 수 있었다. 절박한 상태에 처한 연구소는 그해 12월, 흡연의 “긍정적 측면”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제안으로, 담배산업연구위원회에 1만 5,880달러의 연구비 비원을 요청했다. 그 후 10년 이상 담배 회사들이 그랜트연구의 주요 지원자가 되었다.
8. 그랜트 연구의 인적 변화
사회심리학자가 책임자로 오면서 그랜트 연구의 한 세대가 막을 내렸다. 1세대 연구원들은 인간의 발달은 지능과 체형에 따라 이루어지며, 성격 특성은 모두 이것들로부터 발현된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현재 이 이론은 인간관계가 인간 발달을 이끈다는 이론으로 바뀌었다.
맥아더는 1955년에 책임자가 되어 1972년에 내가 연구 책임자로 임명될 때까지 그랜트 연구를 이끌었다. 연구팀에 합류했을 때 맥아더는 그랜트 연구팀의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는 흡연 습관 질문을 함으로써 또 다른 담배 관련 후원사였던 필립 모리스의 재정지원을 받아내어 연구를 힘겹게 진행했다. 그러나 1960년에서 1970년까지 그랜트 연구의 성과물이라고 발표한 저작물은 4개에 불과했다. 설문지 발송도 3년에 한번으로 줄여야했다. 그리고 17명의 대상자들이 10년 이상 연구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맥아서는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의 흡연 습관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어떤지를 연구했으며, 당시 직업 선택과 만족도를 가장 잘 예견해주는 검사법이던 스트롱 직업흥미검사를 장기적으로 입증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 몇 편을 발표했다.(부록 F 참조).
[30] 이 논문들은 그랜트 연구가 전향적 종단 연구를 이용해 얻어낸 첫 번째 성과물이었다.
1967년 그랜트 재단이 맥아더에게 3년 동안 10만 달러를 지원한 덕분에, 당시 결혼 생활 중이던 루이스 그레고리 데이비스가 연구에 합류해 설문지 발송 업무를 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연구팀에 합류한 뒤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누락된 17명의 대상자들은 다시 참여시킨 것이다. 그 뒤 45년 동안 생존 대상자 가운데 7명만이 자발적으로 연구에서 탈퇴했다. 그 후로는 완전히 누락된 대상자는 없었다.
9. 졸업 25주년 기념 모임
내가 그랜트 연구에 합류한 첫 애에 졸업 25주년 동창회가 열려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이 모였다. 나는 설문지를 고안해 25주년 동창회에 모인 1944년 졸업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연구팀은 대상자들이 1학년 때 받은 신체검사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일반학생에게 나타난 직업 선택의 비율은 하버드 집단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25주년 동창회에서 이 두 집단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차이는 <표 3-3>에 요약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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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연구 대상자 44명 |
일반 동창생 590명 |
|
설문지를 작성 |
92% |
명확한 관련 |
70% |
우등으로 졸업 |
61% |
명확한 관련 |
26% |
대학원 진학 |
76% |
|
60% |
직업에 만족 |
76% |
명확한 관련 |
54% |
아버지보다 직업 성공도가 낮음 |
2% |
명확한 관련 |
18% |
1년에 병가를 2일 이하 사용 |
82% |
명확한 관련 |
57% |
베트남전에 관여도를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함 (1968/69 겨울) |
93% |
|
80% |
공립고등학교에 다님 |
57% |
|
44% |
이혼한 경력이 있음 |
14% |
|
12% |
교회에 자주 감 |
27% |
|
38% |
술을 4잔(6온즈) 또는 그 이상 마심 |
7% |
|
9% |
대학 이후 정신과 진료를 10회 이상 받음 |
21% |
|
17% |
매우 명확한 관련 = p<0.001; 명확한 관련 = p<0.01; NS = 관련 없음 |
졸업 후 삶과 사랑, 직업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일반 졸업생들은 설문지 작성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비교 자체가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몇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하버드 집단 학생들은 일반 동창생들에 견주어 대학 생활과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한 것으로 보였다. 하버드 집단 구성원들이 품었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이들이 크게 성공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구팀은 대상자들을 선정할 때 전통적인 개념의 성공을 거둘 만한 학생들을 선정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절제하여 사회에서 전통적인 성공이라고 믿는 일을 성취할 만한 대상자의 수가, 삶을 즐기며 살 대상자의 수보다 많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고 해도 중년에 접어든 대상자들이 이룬 성공은 대단했다.
10. 그랜트 연구에 합류하다.
나는 국립보건원에서 받은 ‘젊은 과학자상’의 지원금 덕에 1966년 그랜트 연구에 합류했다. 맥아더는 내게 다음 두 번의 정기 설문 문항을 만들도록 허락했다. 그랜트 연구는 객관적인 신체 건강에 대한 전향적 기록을 가졌기 때문에 인성 발달에 관한 다른 종단 연구와 차이를 이룰 수 있었다.
내 접근법은 찰스 맥아더의 것과는 달랐다. 나는 사회심리학자가 아니라 정신분석을 전공한 의사였다. 나는 초기에 헤로인 중독과 급성 정신병 회복을 연구하면서 회복이 빠른 환자들이 사용하는 비자발적인 적응 기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만든 문항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이를 통해 값진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질문을 접한 대상자들의 독창적인 반응은 그들의 적응 방법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대상자들이 사용한 단어나 꿈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랜트 연구에서는 대상자들을 장기적이고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서 그들의 구체적 행동에서 나타나는 소위 자기 방어적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랜트 연구에 합류한 바로 뒤에 “성숙”이라는 두 번째 관심사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인간의 방어기제와 회복탄력성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성숙 과정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면담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대상자들과 긍정적인 정신 건강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쉽고도 의미 있는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고 또 흔쾌히 그렇게 한다.
1967년에서 70년 사이에 나는 무작위로 1942~44년 졸업생 가운데 50퍼센트의 대상자들을 재면담했다.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에 에바 밀로프스키가 나머지 50퍼센트의 대상자들을 재면담했다. 1990년 무렵 퇴직할 나이가 된 대부분의 대상자들은 재면담을 받았다. 그중 반은 내가 직접 면담했고, 나머지는 재능이 많은 마렌 배털든 박사가 했다. 2004년에서 2006년 사이 생존해있던 대상자가 약 85세가 되었을 때 로버트 웰딩거와 그가 이끌던 연구팀은 대상자들과 그들의 부인들을 다시 한 번 면담했다. 그리고 1970년 조직 개편 후 그랜트 연구는 글루엑 연구의 이너시티 집단 대상자들에 대하여 하버드 집단에게 했던 후속 조사와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후속 조사를 진행했다.
숨은 진실은 대상자들을 장기적으로 후속 조사한 뒤에만 드러났다. 과묵한 성격의 한 대상자는 3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뒤 산후 우울증을 앓았다고 고백했다. 등등
친밀한 인간관계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정신과 의사 로버트 웰딩거 박사가 내 뒤를 이어 2005년에 그랜트 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2004년에서 2006년까지 대상자들을 재면담한 동시에 동의한 부부는 영상 촬영을 하고 DNA샘플도 수집했다.
11. 그랜트 연구의 재정 이야기
그랜트 연구에 계속적인 재정 지원을 마련하는 것은 힘든 걱정거리였지만, 탄력적인 상황 대처와 풍부한 인적 자원, 그리고 운이 따라주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나는 젊은 과학자상 뒤로 30년 동안 월급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연구비 지원은 따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퇴직한 루이스 그레고리 데이비스를 재영입할 수 있도록 그랜트 재단에 800만달러를 지원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후 5만 달러를 후원받았으며 이는 향후 30년간 계속적으로 그랜트 연구의 재원을 확보할 토대가 되었다. 시기도 좋았는데, 국립 알코올 남용 및 중독연구소가 막 문을 열어서 상대적으로 풍부한 재원을 갖고 있었다.
국립 알코올 남용 및 중독 연구소는 1972년에서 1982년 사이 그랜트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하며 알코올리즘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연구소 책임자로 부임하고 대상자들이 50세가 되었을 때 처음 발표한 논문은 의사가 된 46명의 처방약 남용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나는 설문 조사와 면담을 통하여 의사가 된 대상자들의 기분전환용 약물 사용과 남용 실태를 다른 대상자들의 그것과 비교했다.
[31] 의사가 된 대상자들은 통제집단과 비교했을 때 기분 전환용 약물을 2배 더 복용하고 남용했다.
이 논문이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발표되면서 그랜트 연구가 많은 관심을 받았다.
[32] 1983년 나는 여러 해 동안의 연구결과를 요약한 <알코올리즘의 역사>를 출간했다.
그해 향후 연구 단계에 더 안전한 재정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다트머스 대학 정신과 석좌교수직을 수락했다. 그랜트 연구소는 10년 동안의 자료를 갖고 하노버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지만 경영은 여전히 하버드 대학교 공중보건학부에서 맡았다.
1986년 그랜트 연구에서는 연구의 초점을 노화로 옮겼다. 나는 인간의 적응에 여전히 관심이 있었지만 윌리 서튼(미국의 악명 높던 은행강도)같은 연구원이어서 돈이 될 만한 일은 뭐든지 했다. 그러나 알코올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 분야에 대해 조금 알게 되자 이내 빠져들었다.
국립노화연구소에 제출한 내 첫 번째 신청서는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제안서를 작성한 노화를 두려워하는 51세의 제안자는 인간의 노화를 전향적으로, 다시 말하면 노화 과정을 점진적 쇠퇴로 추적조사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을 깨달은 뒤 노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나는 다시 한 번 신청서를 제출했다. 국립노화연구소는 그랜트 연구에 지원하기로 했고, 그 결과 나는 2002년에 <행복의 조건 aging well>을 출간했다.
1992년 브리검 여성병원에서 내게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고, 그랜트 연구소는 보스턴으로 다시 옮겨갔다. 2010년까지 그랜트 연구소는 브리검 여성병원에 있다가, 2005년에 연구 책임자가 된 로버트 웰딩거가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으로 옮겼다.
12. 그랜트 연구가 관련자들의 삶에 끼친 영향
우리는 그랜트 연구의 대상자들이 조사에 참여하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고자 했다. 그들 대다수는 연구 과정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변화를 일으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연구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연구팀도 이 연구가 자신에게 준 영향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연구원인 아트 밀러라는 사람과 연결된 이야기다. 아트밀러의 이야기는 장기적 시각만이 성급한 결론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 아트 밀러 : 외상 후 성장을 이루다.
1960년 아트 밀러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는 2차 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뒤 존 몽스와의 면담에서 전쟁 중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는 경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한 뒤 르네상스 시대의 드라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라져서 20년 동안 유일한 “추적 불가”대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 나는 그의 노모와 연락이 닿았고, 그의 어머니는 밀러가 대학 교수직을 오래 전에 그만두고 서호주로 이민을 가 고등학교에서 드라마를 가르치며 가족들과 산다고 말했다. 나는 밀러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가 호주로 그를 만나러 가도 되는지 물었고, 그는 흔쾌히 승낙하는 듯 했다. 회피 성향을 갖고 있던 대상자가 나를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하는 듯 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불만 때문에 호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여러 이유를 댔는데, 나는 잠시 그가 다른 이유로 미국을 등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문 면담을 마친 뒤에도 밀러는 내 전화를 언제나 친절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보낸 설문지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이 어디에 사는지 하버드 대학에 알리지 않았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정신과 의사들은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많은 사람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관해 연구했으며, 밀러 역시 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을 떨쳐버렸다.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다양한 가설을 만들었지만, 모두 그럴듯한 가설은 아니었다. 2009년 나는 기록을 살펴보았다. 기록 속에서 1950년 대상자들의 참전 당시 의무 기록을 검토하려고 워싱턴으로 갔던 클라크 히스가 작성한 서류철을 발견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5년 뒤 나는 아트 밀러가 군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다.
평가는 쉬웠다. 나는 밀러가 보여준 순응하지 않는 태도와 수동공격성 행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가 가족과 조국으로부터 달아났다는 사실과 그의 수입이 그랜트 연구 대상자 가운데 가장 낮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나는 아트 밀러의 인생을 외상 후 성장을 이룬 창조적인 표본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 에드워드 올비와 유진 오닐 같은 많은 극작가들이 충격적인 아동기나 심각한 우울증을 겪은 뒤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었다.
13. 그랜트 연구와 함께 성장한 삶
그랜트 연구 기간의 반이 넘는 세월 동안 연구를 이끌었던 사람이 나이므로 나 자신이 발달 과정에서 겪은 일과 그 경험으로부터 생겼을지 모르는 편견들을 소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뉴욕에서 학구적 분위기의 와스프(앵글로 색슨계 백인 신교도: 미국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지배 계급으로 여겨짐)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나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고, <램푼>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나는 교육과 봉사는 선한 일이지만 사업과 개인 진료는 옳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하버드 대학교 의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적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청교도적 생각을 불어넣었다.
나는 많은 동료들처럼 정신과 의사로서 특정한 “학파”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내가 정신분석학자로 훈련받았으며, 아돌프 마이어와 에릭 에릭슨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18세 까지는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19세 때 룸메이트의 책 가운데서 <발전하는 삶 Lives in Progress>을 읽은 뒤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33] 로버트 와이트가 쓴 이 책은 성인발달에 관한 전향적 연구로 설계된 최초의 책일 것이다.
터프츠 의과 대학 정신과에서 조교수로 일하던 시기인 1966년에 나는 그랜트 연구에 합류했고, 단번에 그 연구에 빠져들었다.
내가 찰스의 뒤를 이었을 때 하버드 대학은 이 연구의 영향력과 중요성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없었고, 나를 그렇게도 흥분시켰던 민감한 자료들을 파기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파일이 특히 민감했던 이유는 1년 전 시위하는 학생들이 공중보건학부 건물의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행정실을 점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랜트 연구의 초점은 다시 한 번 옮겨갔다. 그 이유는 나의 관심이 사회학에서 유행병학과 정신역학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비자발적 대응기제, 그리고 심리적 스트레스와 신체적 증상 사이의 상관관계에 매료되어 있었다. 70세를 넘기며 나는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사람들의 긍정적 감정과 영적 경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확신했다. 나는 또한 사랑과 연민을 좋아하는 특징이 포유류에게 내장되어 있다고 믿는다.
14. 하버드 그랜트 연구의 미래
내가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려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맺은 가까운 인간관계가 우리 삶의 질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친밀한 인간관계를 연구한 예는 아주 적다.
그러나 국립정신건강협회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이러한 연구에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과학계의 유행은 다시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생물학으로 눈길을 돌렸다. 만일 윌리 서튼이 오늘날 성인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 연구비를 지원한다면, 연구의 중심은 뇌가 될 것이다.
재원 확보를 둘러싼 어려움은 난처한 문제이기는 했으나 빠져나가지 못하는 저주는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재원 조달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그랜트 연구팀은 생물학적, 신경과학적 자료들을 약 75년 간 추적한 대상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와 취합하는 데 힘을 실어주었다.
사회가 노령화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가족들과 의료인과 정책 입안자들에게 더 급박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엘리트 그룹을 선정해 진행하는 연구에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 가운데 하나는, 특별히 90세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온 그랜트 연구 대상자들의 연구가,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보통 사람이 30년 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말해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