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03_품격 있는 삶
아리스토텔레스틑 <니코마코스 윤리학(Nichomachean Ethics)>에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으로 덕스러움을 제안했다. 德(덕)과 행복에 관한 철학적 주장들은 현대 심리학의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해서 사실임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특히 중요한 덕목인 ‘이타성’과 ‘친사회성’에 관한 연구들은, 덕이 행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행복을 유발하는 인과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1] 한 예로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행복 효과가 크다는 점을 밝혀낸 연구도 있다.
타인에게 도움주기, 자원봉사, 기부는 개인 행복 뿐 아니라 국가 수준의 행복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세 가지를 합쳐 나눔 지표(Giving index)를 만들어 각 국 행복 지수와의 관계를 분석하면, 정적(+) 상관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나누고 베푸는 문화가 일상이 된 나라에서 사는 국민들의 행복감이 높다.
그러나 덕스러운 삶을 굿 라이프의 중요 요소로 포함시키려는 노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덕스러운 삶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덕스러운 삶이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문제 제기다. 다시 말해 덕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염려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덕스러운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행복의 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없을까?
이 점에 대한 철학자 로절린드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다.
[2] 그는 덕스러운 삶이 좋은 삶을 위한 ‘유일한 수단(the only reliable bet)’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최근 심리학 연구들은 다양한 형태의 덕이 행복과 관련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이 좋은 삶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할 수 없더라도 좋은 삶을 위해 덕스러운 삶을 살라고 추천할 수는 있다.
노골적이지 않게 덕스러운 삶을 추천하고자 하는 입장은 ‘자유주의적 개입(libertatian paternalism)’과 유사하다. 이는 행위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행위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굿 라이프>의 입장도 이와 같다. 덕이 있는 삶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덕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은 삶에 유리하다고 제안하는 정도의 입장이다.
인간의 최고 덕목 중 하나가 타인의 행복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보면, 덕스러운 삶을 굿 라이프의 핵심 요소로 끌어안아야 하는 점이 더 분명해진다.
3부에서 덕스러운 삶이라는 표현 대신 품격 있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여전히 ‘덕’이라는 표현에 도덕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다. 굿 라이프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숙제를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오히려 힘든 삶을 제안하게 될 수도 있다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이타성이나 친사회성과 행복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덕목들과 행복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부족한 편이다. 많은 덕목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심리학이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사실들이 인간의 품격이라는 표현으로 더 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3부에서는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덕스러운 삶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의 관점에서 품격 있는 삶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1.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
[3] 부자들은 남들도 부자인 줄 안다.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남들도 체력이 좋은 줄 안다. 등
심리학이 발견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중심성이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의 보편적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하며 이 세상은 나를 포함한 상식적인 다수와 비상식적인 소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정상과 상식적 인간에 대한 욕망은 관계 편중성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자기들끼리 그룹 과외를 한다.
우리의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식이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와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뀌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관계 편중성은 지리적 편중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이유는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때문이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이유는 그들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格(격)이란 관계의 편중성이 가져오는 의식의 편중성을 의식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에 있다.
현대 경영의 구루(guru)이자 사상적 리더인 오마에 겐이치(Omae Kenichi) 역시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을 바꿀 것, 만나는 사람을 바꿀 것, 그리고 시간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지리적 공간을 바꾸는 일이 자신이 접하는 사람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사를 하기 좋은 시기란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을 때여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곁에서 사는 삶은 그 자체가 축복이다.
2. 여행의 가치를 아는 삶
어떤 여행은 인생을 바꾼다.
1850년부터 1945년 사이에 태어난 피카소, 클레, 칸딘스키, 워홀, 고흐 등 이름만 들어도 소름 돋는 모던 아트의 슈퍼스타 214명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 경매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같은 화가의 것이라 할지라도 여행 중에 그린 작품은 일상 시기에 그린 작품보다 경매가가 평균 7퍼센트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 매해 기록을 경신하는 그들 작품의 경매가를 감안하면 7퍼센트는 어마어마한 액수 차이다.
새롭고 낯선 환경을 의도적으로 접하려는 노력의 대가가 작가 등 한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 시계에 대한 개방성이 문화 발달에 끼치는 영향은 가까이에 있는 일본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5] 580년에서 1939년 사이에 일본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외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지, 외국인 스승을 둔 적이 있는지,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는지, 그리고 같은 시기에 일본을 방문한 유명한 외국인이 있는지 등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특정 시기의 일본 사회의 문화 개방성이 그 시기의 일본의 성취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 연구는 한발 더 나아가 그 효과가 세대를 걸쳐서 나타날 수 있음을 밝혀냈다. 다시 말해, 현 세대의 문화 개방성이 후속 세대의 성취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자국 중심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개방성(openness). 심리학에서는 이를 ‘한 개인의 정신적 경험적 삶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독창성과 복잡성’이라고 정의한다. 의식의 개방성과 경험의 개방성, 인간의 품격을 판단하는 데 이만한 잣대도 없다. 애초에 개방적인 사람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더 시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들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거꾸로 우리 안의 개방성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도 명확히 보여준다. 이주한 과학자들의 연구가 본토 과학자들의 연구보다 더 독창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여행과 이주를 보는 우리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여행은 단순한 레저가 아니며, 이주는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개인에게는 확장된 자아, 개방적 자아를 심어주는 일이고, 사회에게는 미래를 위한 장기 투자다. 무엇보다 삶의 품격을 세우는 일이다.
[6] ‘이주하는 자의 이점(The mover’s advantage)’이라는 한 논문의 제목처럼 이동하는 자, 여행하는 자에게는 열린 의식이라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
3. 인생의 맞바람과 뒷바람을 모두 아는 삶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갈 때와 올 때의 비행시간은 약 두 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제트기류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동일한 거리에서 발생하는 비행시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맞바람 때문에 늘어나는 비행시간을 고려하지 못한 채 충분한 연료를 싣지 않고 비행에 나서는 아찔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안전한 비행기 운행을 위해서는 뒷바람과 맞바람의 힘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은 뒷바람으로 인한 시간 단축보다는 맞바람으로 인한 시간 지연을 더 크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원리가 인생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뒷바람의 힘에는 둔감하면서 우리의 삶을 더 어렵고 거칠게 만드는 맞바람의 힘에는 예민하다. 우리는 감사할 대상보다는 원망할 대상을 찾는데 더 능하다.
[7] 또한 우리는 자신에게 불어오는 맞바람이 타인에게 불어오는 맞바람보다 더 거세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상황이 타인의 상황보다 불리하다고 믿는다.
보수는 보수라서 불리하고 진보는 진보라서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가진 자는 가진 자라서 불리하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서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불고 있는 뒷바람은 무시한 채 앞에 있는 맞바람만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고 있는 맞바람만을 탓하기보다 뒷바람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런 품격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우리의 삶은 뒷바람을 타고 순항하는 항해와 같을 것이다.
4. 냉소적이지 않은 삶
冷笑(냉소). 그 차가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특히 좋은 의도로 한 일에 냉소적 반응으로 돌아오면, 그 당사자도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 쉽다. 냉소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전 재산의 99퍼센트를 평생에 걸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존경만이 아니었다. 냉소적인 태도가 쏟아졌다.
왜 인간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의심하고 경계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냉소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목일까? 냉소는 필요악일까?
만일을 대비한 의식과 준비는 자신에게 닥칠 손실과 상처를 예방해줄 수 있다. 이런 잠재적 혜택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를 보면 일반적으로 냉소, 특히 냉소적 불신은 혜택을 안겨주기보다는 심각한 역풍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역풍은 주변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냉소적 불신이란 선한 행동 이면에 이기적 욕심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칭한다.
우선 냉소적 불신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늘 기분이 좋지 않다. 한마디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냉소주의자의 특허인 적대적 태도, 공격성, 분노는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8]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냉소적 불신은 치매 가능성까지 높인다.
냉소의 역풍은 인간관계에도 불어 닥친다. 냉소적인 사람들에게는 협동의 기회가 잘 찾아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에서 그들은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냉소적인 사람들은 이 같은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경제적 수입에도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9]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교류 관계에서 서로 간에 제공하는 기회가 그들에게는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냉소적인 사람들은 일을 잘하지 않을까? 연구 결과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강한 경쟁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탁월성 자체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만일 이들이 리더라면 어떨까? 구성원들에 대한 불신 때문에 감시와 평가에 집착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유무형의 장치를 만드는 데 골몰할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의 비즈니스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냉소적 불신을 유발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결함들이 있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냉소적 불신은 의식의 미세먼지 같은 것이다. 늘 뿌옇게 세상을 보고 있으니 좋을 게 없다.
품격 있는 사람은 비판적 사고와 냉소적 불신의 미묘한 차이를 아는 사람이다. 비판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냉소 어린 독기를 뿜어내지 않는 사람이다. 건설적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기를 꺾는 사람이 아니다. 굿 라이프란 이런 격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이다.
5. 질투하지 않는 삶
네이마르는 결국 FC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그가 택한 것은 돈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질투에서 벗어나는 행복이었다.
스타플레이어는 팀 내에서 축복이자 위협이다. 팀 전체의 성과와 인지도를 올려서 그 혜택이 모든 팀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축복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만 집중되는 관심, 그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되는 기회는 다른 팀원들에게 질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스타를 향한 개인들의 질투는 자연스럽다.
문제는 질투가 개인을 넘어 집단에서 조직적으로 경험될 때 생긴다. 질투가 집단적 현상이 되어, 화합과 협동이라는 대의명분을 등에 업고 탁월한 소수를 은밀하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괴롭힐 때, 질투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넘어 소수를 향한 다수의 갑질이 되기 쉽고 종국에는 모두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집단행동에 관한 많은 연구는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이 정작 동료들에게는 차가운 평가는 받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밝혀왔다. 이들의 이직률이 높은 이유는 높은 수요와 성취욕도 있지만, 이들이 조직 내에서 경험하는 은밀한, 때로는 노골적인 질투와 냉대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협동과 화합, 균등과 단합을 중시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 장점이 양날의 칼이 되어 평균을 깨는 소수의 탁월한 개인과 집단을 은밀한 방법으로 괴롭혀서, 결국은 모두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위험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
[10]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반사회적 처벌(antisocial punishment)’이라는 현상을 소개하는 논문이 실린 적이 있다.
반사회적 처벌이란 공동체를 위해서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을 오히려 벌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왜 벌주려하는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집단의 평균을 깨트리고 남들 모두를 바보로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당히 하면 되는데 튀는 바람에 우리가 바보가 되었다는 심리가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벌주는 행동을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이런 반사회적 처벌의 빈도가 높게 나타난다.
반사회적 처벌은 은밀하게 일어난다.
중요 직책에 임명된 사람들에 대한 과거 동료들의 칭찬이 인색한 경우를 자주 본다. 이런 풍토가 조직 전체의 특징이라면, 더 나아가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탁월한 조직이란 집단의 단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조직이다. 집단적 질투가 집단의 화합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채용한다. 품격 없는 조직은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갈수록 못한 사람들만 채용해서 결과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는다. 품격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뛰어난 후배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를 스타로 성장시키기 위해 진심으로 돕는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진실로 축복받은 삶이다.
6. 한결같이 노력하는 삶
어느 분야에서나 1만 시간 이상 노력하면 대가가 된다는 ‘1만 시간의 법칙(the 10,000 hours rule)’이 학계에서 반박되고 있다.
[11] 그중에서도 2014년에 발표된 논문 하나가 언론을 통하여 소개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매우 유감스럽게도 국내 한 신문이 결론을 심각하게 왜곡 보도하는 바람에 논문 저자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국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자조적인 반응이 생겨났다.
이 논문의 정확한 결론은 ‘훈련이 중요하지만, 이전에 주장되던 것만큼은 중요하지 않다’이다. 누구라도 재능과 상관없이 노력만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주장이 과장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지, 결코 노력하지 말라는 주장이 아니다.
둘째, 이 논문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여러 영역에서의 재능과 노력의 상대적 영향력을 숫자로 표시했다. 예를 들면 음악에서는 노력의 영향력이 21퍼센트, 선천적 재능의 영향력이 79퍼센트라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보도했다. 그러나 원 논문 어디에도 이러한 주장은 없다. 이 연구는 노력, 정확히는 훈련 시간의 차이가 성취의 차이를 설명하는 변량(variance)이 음악에서는 21퍼센트라고 말하고 있을 뿐, 나머지 79퍼센트의 변량이 모두 선천적 재능으로 설명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구 방법론상 결코 그런 주장을 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국내 신문사는 선천적 재능으로 뒤바꾼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노력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당연히 재능일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셋째, 재능과 노력의 구분은 그리 간단치 않다. 둘은 역동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노력이 정확히 몇 퍼센트, 재능이 몇 퍼센트라고 칼로 무 자르듯 결론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1만 시간의 법칙을 둘러싼 논쟁은 ‘최고 수준의 전문성’에 관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노력만으로 최고 수준의 전문성이 획득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노력의 양과 성취의 정도가 비례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大學(대학)>에 나오는 “心城求之, 雖不中不遠矣(심성구지, 수부중불원의)라는 마음가짐이 최선이다.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7. “내 그럴 줄 알았지”라는 유혹을 이겨내는 삶
어떤 일의 결과를 알고 나면 모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이런 생각의 오류를 심리학에서는 사후 과잉 확신 편향이라고 부른다.
[12] 어떤 일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선경지명의 능력은 없어도, 일단 결과를 알고 나서 뒤에서 보면 마치 처음부터 그 일을 예측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는 후면지명의 심리를 지칭하는 용어다.
이런 후견지명의 착각은 때로 득이 되고 때론 독이 된다. 후견지명의 착각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비극에서 오는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즉 어떤 비극이든지 쉽게 설명해줌으로써 고통의 크기를 줄여주는 기능을 한다.
후견지명의 착각은 인간 삶에 필요한 요소지만, 동시에 심각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충분하고 체계적인 분석 없이 너무 빨리 진단과 대책을 마련하는 위험성과, 이러한 착각은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착각을 강화시켜서 우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폄하할 가능성이 높다. 후견지명의 착각은 우리에게서 思考(사고)의 집요함을 빼앗아간다.
후견지명의 또 다른 위험성은 놀람의 실종이다. 놀람이라는 감정은 지적 호기심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다. 그런데 후견지명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코 호기심을 갖지 않게 된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그 자신이 지적 호기심의 결핍이라는 피해를 입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죄를 범한다.
품격 있는 삶이란, 후견지명이라는 달콤한 지적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남들을 비난하며 우쭐해한다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요?’라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놀라는 사람이다. 모두가 빠른 진단과 대책을 앞 다투어 내세울 때, 몇 년이고 그 문제를 집요하게 그리고 골똘히 생각해서, 그 문제로부터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는 사람이다.
8. 假定(가정)이 아름다운 삶
인간의 의식이란 가정들의 집합체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이루려는 경제 원리를 따른다. 가정은 ‘주어진 정보를 넘어서게 하는(beyond information given)’ 강력한 힘으로 작동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의식의 작용을 하향식 처리(top-down process)라고 한다.
인간은 각자 보유한 가정들에 의해 구분된다. 인격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정의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 수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정들을 점검하여 나쁜 가정을 좋은 가정으로, 근거가 없는 가정을 정확한 가정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구하는 피아니스트 임현정에게 한 기자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13] 그에 대해 임현정은 “사교 활동을 일체 안하고 음악에 집중하면 가능하죠. 음악과 나 사이를 보호해야 해요”라고 응답했다.
세상을 음악과 자신 사이를 방해하는 곳으로 가정하고 있는 이 피아니스트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요?”라는 기자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저서 <마지막 강의(the rast lecture)>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고 세상을 떠난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랜디 포시(Randy Paush) 교수는, 실패란 “내가 그 일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 테스트해보는 것”이라는 가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가정 때문에 그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경험하는 우월감이 행복의 원천일 것이라고 가정했던 한 연구자가 있었다. 그는 미국 최고 명문대 학생들 중에서도 아주 행복한 학생들에게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낀 경험을 들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적인 대답은 “비교요? 잘 안하는데요”였다. 정작 행복한 사람들은 비교를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의 가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가정들의 차이다. 누구나 하는 평범한 가정을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 품격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품격 있는 가정이 우리를 반드시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더라도 그런 가정을 품고 사는 사람 주변에 있는 사람은 분명 행복해질 것이다.
9.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삶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 이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인식이다.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또렷한 감각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는 자각이다. 비로소 우리를 철들게 만드는 깨달음이고, 내 피부 경계 안쪽의 좁은 세계에만 머물러 있던 인식을 자연과 우주와 인류 보편과 신의 세계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결정적 전환이 되기도 한다.
[14] 이런 인식의 시프트와 함께 우리의 심리 상태 또한 근본적인 시프트를 경험하게 된다.
우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게 만든다. 굳이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과감히 포기한다. 굳이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만나면 기분 나쁜 사람들, 꼭 나갈 필요가 없는 모임들에 대한 의무감이 사라진다. 무릇 미움 받을 용기란 나이 들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법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은 감정의 시프트도 만들어낸다. 즐거워도 마냥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애틋한 감정을 느낀다. 우리의 의식이 나이에 따라 적절하게 시프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산 사람들의 감정은 철학적이다.
나이가 들면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믿게 되며, 지금의 나는 무한히 얽히고설킨 사건과 인연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실패에서도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인생이 하나의 스토리임을 깨닫게 된다. 젊은 날, 깨닫기 어려웠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원리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깨달아진다.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큰 위로와 지혜를 얻는다. 미움 받을 용기가 가득한 그들에ㅔ서 경외감을 느낀다.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삶의 품격이다.
10.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삶
좋은 글과 좋은 삶에는 공통점이 많다.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기 위해서 단 한 줄의 글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좋은 삶도 얼마나 오래 사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서른셋을 살고 간 청년 예수의 짧은 삶이 좋은 예다.
길이와 형식에 상관없다면, 어떤 글을 좋은 글로, 어떤 삶을 좋은 삶으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하나는 생명력이다. 생명력 있는 글이 좋은 글이고, 생명력 있는 삶이 좋은 삶이다. 생명력 있는 글이란 불필요한 副詞(부사)가 많이 쓰이지 않은 글이다.
[15] 미국의 작가 스티븐 킹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adverbs)”라면서 불필요한 부사의 남발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좋은 삶도 그렇다. 불필요한 부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인생은 생명력이 없다.
좋은 글과 좋은 삶의 두 번째 특징은 톤(tone)이다. 지나치게 강한 어조의 글은 독자들의 자유를 침해한다. 독자들의 상상력도 제한한다. 학자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저널에 논문을 투고했을 때, 단번에 심사를 통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연구 방법론의 한계나 분석의 오류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글 자체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심사자들이 단골로 지적하는 것이 문장의 톤이다. 글의 어조를 낮추어달라고 늘 요청한다. 증거는 최대한 치밀하고 확실하게 갖추되, 주장은 유연해야 좋은 논문이다.
좋은 삶도 그렇다. 아무리 자기 확신이 강하더라도 지나치게 단정적인 어조로 삶을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자유의 침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인 경우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의식의 편협함을 드러낼 뿐이다.
유연한 삶이 곧 타협하는 삶은 아니다. 삶의 복잡성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고, 생각의 다양성에 대한 쿨한 인정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용기 있는 고백이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확신으로 타인을 몰아붙이는 것은 타인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상대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다.
[16] 이문재의 시 <농담>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자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인의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농담의 뜻은 가벼운 농담이라고 이해하면 삶의 어조를 낮추고 지나치게 심각하게 살지 않는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톤을 낮추는 듯하다.
물질과 권력과 이미지를 향한 욕망이 득실거리는 이 물질주의 시대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면 루저가 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한 이 자기표현의 시대에, 인생의 부사를 줄이고 삶의 어조를 낮추는 자세로 살았으면 좋겠다.
—Part 03을 나가며—
인생에는 우리 자신의 행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많다. 그 중 으뜸은 타인의 행복이다.
타인의 행복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품격 없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비록 자기 성찰의 노력이 우리를 곧바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삶에 품격은 더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