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불행히도, 제 책은 주제가 지나칠 만큼 시의적절한 순간에 대한민국에서 출간됩니다” -마사 C. 누스바움, 한국어판 서문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분노를 자극하는 사회였습니다. 부의 양극화에 따라 일어나는 ‘갑질’을 비롯한 온갖 사회 부조리, 청소년의 잔혹한 흉악범죄와 파렴치한 성범죄, 일상적으로 짓밟히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 이 모든 곪아터진 상처를 소독하고 돌봐주기는커녕 구더기처럼 그 피고름 속에서 뒹굴던 이전 정부를 떠올리자면, 이른바 적폐 청산을 우리 시대의 화두로, 분노를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감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분노하지 말라는 말에서 “가만히 있으라”던, 한스럽고 위선적인 명령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가 정상화되고 분노가 해소된 지금까지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너무 쉽게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처벌 형태로 해소하려 드는 것일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분노라는 감정을 면밀히 검토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로 보입니다. 사실, 최근 남북의 해빙 분위기를 가능하게 한 것도 응징과 보복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분노에서 벗어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한 전향적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조금씩 보이는 요즘입니다. 한편으로는 물을 흐려 이 희망을 지저분한 보복의 무대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보이기도 하죠. 그 어느 때보다도 명징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석학,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사법 차원에까지 이르는 온갖 불평등으로 인한 ‘갑질’로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한 이 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직장에서도, 전철이나 버스, 가게에서 잠깐 만나는 사람을 상대로도, 온갖 분노를 느끼고 삭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며 살아간다. 이토록 일상적인 감정에 대해, 한편에서는 분노야말로 정의 사회를 실현하는 추동력이라며 ‘분노하라’고 부르짖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를 삭이거나 다스릴 대상으로 보고 ‘힐링’으로의 과몰입으로 넘쳐난다.
우리 시대를 선도하는 유명 지식인 중 한 사람인 마사 C.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분노’와 ‘용서’를 재정의하면서 분노의 본질이 복수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복수가 건전한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파악하는 만큼, 누스바움은 ‘말도 안 돼!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라는 표현으로 축약되는 분노를 ‘이행-분노Transition Anger’라는 이름으로 구분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 넬슨 만델라 등이 보여주었던 감정이 바로 이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용서는 분노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누스바움은 대단히 감상적으로 취급되는 용서 개념의 다양한 구조를 유대교와 기독교, 세속 도덕의 전통 속에서 탐구한다. 누스바움은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대가로 용서를 베풀어주는 거래적·교환적 용서란 모든 문제를 서열과 상대적 지위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자아도취적 분노 및 보복과 맥을 같이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지향적 태도로, 누스바움은 피해가 발생했을 때 누가 더 잘못을 많이 했는지 따져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몸을 낮추고 빌며 자비를 청하는 거래적 용서를 하기보다 피해사실이 있었음을 공인하고, 최대한 그 피해를 복구하며, 다시는 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미래지향적 태도를 요구한다.
친밀한 관계,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 적용된 누스바움의 통찰력 깊고 박학한 시각은 분노와 용서 모두에 놀랍도록 새로운 빛을 비춘다.
*복수의 여신에서 자비의 여신으로
이 책은 2014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진행된 ‘존 로크 강좌’의 강의록을 기반으로 하였다. 누스바움은 복수의 여신들이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다스림 덕분에 도시문명과 공존할 수 있는,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한다는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결말부분을 인용하면서 강의를 시작한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현대의 사회심리학자, 철학자들의 철학적 논의를 광범위하게 참조하면서 분노라는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다양한 문학작품과 현실의 여러 사건들, 심리학적 논의들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나간다.
분노와 용서를 재정의한 뒤, 누스바움은 세 가지 영역에서 분노의 작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첫 번째 영역, ‘친밀한 관계’에서는 자식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취해야 하는 감정적 반응에 대해 문학작품의 분석을 곁들여 교육자로서의 지론을 내놓거나, 내면에 집중하여 분노를 곱씹게 만드는 현대의 심리치료 기법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두 번째로 누스바움은 가게 점원 혹은 전철이나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 직장 동료나 상사 등 ‘중간 영역’의 타인이 분노를 촉발하는 경우를 다룬다. 이때 누스바움은 세네카의 서신을 참조하며 스토아학파적 금욕주의 및 거리 두기를 효과적인 전략으로 제안한다. 만일 거리 두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피해가 초래됐을 경우에는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 ‘정치적 영역’에서, 사법제도에 분노라는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누스바움의 입장은 확고하다. 범죄를 예방하거나, 범죄피해를 사후적으로 복구하는 데에 분노라는 감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점을 국가 간 사례를 비교분석함으로써 강력하게 제시한다. 또한 분노 감정이 개입할 경우, 사법제도가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자들 사이에서 불균형하게 작동하게 된다는 우려도 확실히 전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감자들을 보유한 미국의 사례를 중심적으로 다루지만, 흉악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뜰 때마다 ‘범죄자 인권만 있고 피해자 인권은 없느냐?’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가 될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옳은가?
우리는 겉으로는 공동체의 미래를 염려하는 듯 통합과 화해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본인의 잇속만을 차리며 부조리한 현실에 무조건 순응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왔다.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마땅한 책임을 지우지도, 이들이 저지른 부당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구성원 대다수의 신뢰를 잃기에 이르렀다. 2016년 OECD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부를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인의 24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해 OECD 평균인 42퍼센트에 크게 못 미쳤다.
그렇다면 누스바움은 사법체계 전체나 사회가 오염되어 있어 법적 대응이 불가능한 경우에 발생하는 분노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 경우에도 누스바움은 분노를 철저히 거부한다. 구체적으로는 영국 식민통치하의 인도, 흑백차별이 여전하던 20세기 전반의 미국, 아파르트헤이트로 흑백 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배경으로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가 보여주었던 ‘비-분노’의 가치를 확인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누스바움이 기존의 ‘비폭력’이라는 외양에 집중하는 대신 ‘비-분노’라는 감정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의 혁명으로 초점을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한 억압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히틀러에 대해서는 이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비폭력’을 주장했던 간디보다는, 전략적으로 폭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결코 분노에 휘둘리지는 않았던 넬슨 만델라가 높이 평가된다.
이 책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제는 허울 좋고 명목만 남았거나 그저 교조화된 신념으로만 존재하는 ‘인권’에 대해서, 정의와 자비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책속으로 추가]
-하지만 직장동료들이 하는 행동 중에는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 세네카는 그런 일들에 하나하나 화를 내기 시작하면 머리가 돌아버릴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야 명예와 지위에 대한 모욕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자신과의 싸움에서 이렇게까지 안정적으로, 완전히 이긴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타인의 잘못된 가치관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행동에는 계속 대처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나갈 방법을 알아내야만 한다는 거예요. 일시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와는 달리 그냥 떠나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분노는 적절한 반응일까요? 용서는 유용할까요? 이제 우리는 이 영역에서 사과가 진전을 이루어내는 데에 중요하며 잠재적으로 생산적이지만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23쪽)
-공평한 정의를 이루기 위해 분노를 내려놓는 건 소심한 반응이 아니에요. 하나의 과잉에 또 다른 과잉을 더한다고 해서 어떻게 사태가 나아지겠습니까? 가해자가 미래에 겪을 고통에만 편집증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저 가해자의 적대적이고 저열한 행위에 나 자신을 얽어맬 뿐이죠. 그런 행위에 나를 개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릴 힘을 주어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가해자가 고통을 겪어야 하더라도 그 문제는 순전히 미래지향적인 문제, 사회적 제도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루는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344쪽)
-그러나 가해행위의 분류만이 잘못된 사회적 가치가 법적 질서를 위협하는 유일한 영역인 건 아닙니다. 훨씬 더 집요하고 비-아이스킬로스적인 위협은, 일단 가해자가 기소를 당해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형벌에 보이는 시각입니다. 복수라는 개념은 2000년 넘게 비판받았고, 비판의 내용도 잘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해자가 유죄판결을 받은 상황만큼은 복수 이념이 계속해서 지배합니다. 간디나 킹, 만델라는 말할 것도 없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벤담이 했던 그 모든 주장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복수 모형에 들어맞는 형벌을 선호합니다. 이에 따르면 ‘저지른 사람이 고통을 받아야’ 하며, ‘앙갚음’이 있어야 합니다. 억제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오직 보복적인 처벌, 그러니까 발생시킨 고통에 대해 고통을 부과하는 것만이 억제 효과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63쪽)
-부당성의 인정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미래지향적 요소인 듯합니다. 부당행위를 공인하는 일은 신뢰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데에, 혹은 복구하는 데에 필수적입니다. 신뢰의 연대가 침해당하거나 심지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신뢰를 복구하려면, 무엇이 부당하고 무엇이 부당하지 않은지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공동체라도 부당행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부당행위의 중요성을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정치제도가 구현하는 정의에 대한 신뢰가 부식됩니다. 사회적 계약이란 생명을 비롯한 인간의 복지를 보호하는 문제이며, 국가는 생명과 인간의 복지를 이루는 다른 요소들이 중요하다는 점을 공표해야 합니다. (366쪽)
-정치적 가치의 공적 표현은 그러한 가치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을 때에 특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직장 성희롱에서부터 은행사기에 이르는 다양한 사건에서는, 그런 행위가 보여주는 무시나 오만함이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가 이 행위를 대단히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공적 진술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문제의 행위에 불쾌한 벌칙을 부과하는 것이 특수억제 효과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일반억제 효과를 낳는 필수적 방법일 수 있습니다. (391쪽)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네카처럼, 니체는 그가 기독교에서 발견했던, 복수에 근거한 도덕성이 무능하고 나약하다는 느낌과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런 무력감이 복수, 많은 경우 신에 의해 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복수라는 공상적 계획의 기쁨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추적합니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강한 사람이나 강한 공동체는 유달리 보복에 집착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그들에게서는 복수에 대한 관심이 차츰차츰, 알아서 자비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됩니다. 니체도 저처럼 ‘형사사법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420~1쪽)
-제 초점은 제도 안에 속한 행위자들의 감정이 아니라 ‘형사사법제도’의 기관들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도 내의 많은 역할에 처음부터 어느 정도 자유재량권이 깃들어 있으며, 따라서 그와 같은 감정적 역할을 잘 수행할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계적이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좋은 판사 혹은 배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정에 휘둘려 사법현장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품위 있는 체제가 마련해둔, 경계선이 명확히 그어진 감정적 역할을 신중히 수행해야 합니다. 즉, 감정적 능력과 상당한 절제력을 모두 계발해야 한다는 거죠. 많은 사회에서 너무도 유혹적인, 분노라는 사이렌의 노래를 생각해보면 후자의 덕목은 특히 중요합니다. (423쪽)
-일반적으로 말해,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이 고통을 겪도록 만들거나 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복수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델라가 보는 대로라면, 그의 목표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백인들의 협조가 필요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어요. 백인들의 지지가 없다면 그러한 변화는 최소한 불안정했을 것이며, 지속적으로 위협받았을 것입니다. 해방운동의 주요 (백인) 구성원이었으며 이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재판소를 설립한 대법관 중 한 사람이었던 알비 삭스는 자신들이 언제나 정치적 평등이라는 긍정적인 목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목표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목표였죠. 만델라가 보기에 비-보복적 태도는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태도입니다. 책임감 있는 지도자라면 실용주의자가 되어야 하는데, 분노는 미래지향적 실용주의와는 양립 불가능하거든요. 분노는 그저 길을 막을 뿐이죠. 좋은 지도자는 가능한 한 빠르게 이행으로 옮겨가야 하며, 아마 인생의 상당 부분을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이행-분노와 실망을 표현하고 심지어 느끼기도 하지만 완연한 분노는 떨어뜨려놓아야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