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_세상, 그 참을 수 없는 애매함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잘 구조화되지 않은 문제’ 혹은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다. 이런 문제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보는 관점, 즉 프레임에 따라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1] 버클리 대학교의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보수 진영은 이라크 침공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진보 진영은 ‘점령’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라크 사태의 본질이 ‘전쟁’으로 명명되면 그 해결책 또한 분명해진다. 전쟁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프레임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으로 볼 때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것은 곧 ‘패배’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점령으로 프레임하면 철수는 당연한 것이 되고, 다만 그 시기만 문제가 될 뿐이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잘 구조화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상 자체가 애매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경험하고 부딪히는 사건들에 단 하나의 분명한 답만이 존재한다면 프레임도 지혜도 필요 없다.
1. 감각의 불확실성
우리가 하는 경험들 가운데 감각적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감각적 경험에도 놀랄 만큼 애매성이 존재한다.
글자 프레임과 숫자 프레임이 그렇다. (13 같은 자극) 완벽하게 동일한 시각 자극이었지만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실체로 경험될 만큼 이 자극은 애매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적 경험도 항상 객관적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프레임에 따라 달리 경험될 수 있는 본질적 애매성을 갖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2. 순서의 힘
[2] 솔로몬 애쉬(Solomon Asch)라는 사회심리학자가 1946년에 수행한 실험은 심리적 속성이 얼마나 애매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 애쉬는 참가자들에게 어떤 사람에 대한 정보를 준 뒤, 그 사람에 대하여 짐작해보도록 했다.
A 조건 -> 지적이다 – 부지런하다 – 충동적이다 – 비판적이다 – 고집이 세다 – 질투심이 강하다
B 조건 -> 질투심이 강하다 – 고집이 세다 – 비판적이다 – 충동적이다 – 부지런하다 – 지적이다
자료를 분석한 결과, A 조건에서 형성된 인상이 B 조건에서 형성된 인상보다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A 조건은 전형적인 천재형의 이미지로 해석되지만 B 조건에서는 교만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해석된다.
이는 시간상으로 앞서 제시된 정보들이 뒤따라오는 정보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주는 프레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 역시 애매한 부분이어서 사용하는 프레임에 따라 동일한 사람을 놓고도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다.
3. 명왕성의 운명
2006년 8월 24일, 국제천문연맹은 체코 프라하에서 총회를 열고 명왕성이 더 이상 행성이 아님을 전 세계에 공포했다. 이제 망망한 우주 속에 명왕성만 홀로 남게 되었다. 더 이상 명왕성이 아닌 ‘소행성 134340’이라는 이름으로.
사실 명왕성이 행성 목록에서 빠졌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이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명왕성 퇴출 논쟁이 크게 흔들어놓으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다. 국제천문연맹은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명왕성을 행성의 지위에서 끌어내릴지 결정했다. 객관적 사실이 생명인 과학에 투표가 웬 말인가? 행성의 지위를 놓고 투표를 했다는 이야기는 행성의 정의에 대해 과학자들마가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나아가 과학이 반드시 완벽하게 잘 정의된 문제만을 다루는 영역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 논쟁에도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연맹은 다시 2006년에 파리에서 회의를 갖고 명왕성을 행성으로 유지하되 유사한 3개의 물체를 행성으로 인정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안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의 중심에는 3개의 물체 중 하나(제나)를 발견하여 명왕성의 행성 지위에 대한 논쟁을 일으킨 칼텍(Cal Tech)의 마이크 브라운(Mike Brown) 교수가 있었다. 그는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수정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행성인지에 결정하는데 투표가필요하다면 그것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결국 연맹은 명왕성을 행성에서 제외하고 ‘전형적인 행성 8개’만을 행성으로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행성의 정의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의 변화가 더 생길지 모른다.
4. 동메달이 은메달보다 행복한 이유
[3] 미국 코넬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1992년 하계올림픽을 중계한 NBC의 올림픽 중계 자료를 면밀히 분석했다. 메달리스트들이 게임 종료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정을 분석하는 연구였다.
분석 결과, 게임이 종료되고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동메달 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나타났다. 비통보다는 환희에 더 가까운 점수였다. 그러나 은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고작 4.8로 평정되었다. 환희와는 거리가 먼 감정 표현이었다.
연구팀은 더 나아가 인터뷰 내용도 분석했다. 분석 결과, 동메달리스트의 인터뷰에서는 만족감이 더 많이 표출되었고, 은메달리스트의 경우 아쉽다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 은메달리스트가 더 만족하지 못할까? 선수들은 자신이 거둔 객관적인 성취를 가상의 성취와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인 성취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최고 도달점인 금메달과 비교한 은메달의 주관적 크기는 선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것이다. 반면 동메달리스트가 비교한 가상의 성취는 노 메달이었다.
이처럼 공간상의 비교, 시간상의 비교, 심지어 상상 속의 비교에 의해서도 현실은 주관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애매성을 가지고 있다.
5. 질문의 위력
비교 프레임은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도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TV를 자주 보는 남성들은 이성 친구나 배우자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판단한다. TV 속 배우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방향으로 프레임되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4] 1990년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 연구팀이 수행한 한 실험에서, 가톨릭 신자 여대생들에게 어떤 여성의 은밀한 성적 상상에 대한 글을 읽도록 했다.
그런 후에 한 조건의 여대생들에게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자신을 아주 짧은 순간 보여주고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하도록 했다. 다른 조건에서는 낯선 중년 남자의 사진을 빠르게 보여주었다. 두 조건 모두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제시되었다.
그 결과, 교황 사진을 접한 여대생들이 자기 자신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물이 경건한 종교적 프레임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임이 항상 외부에서 강요되거나 은밀히 유도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 혹은 ‘담화’가 우리에게 특정 프레임을 유도할 수도 있다.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인지 내성적인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는 외향적인가?” 라고 자문한 후에 자신에 대해 평정한다고 해보자. 이 사람은 과거 행동 회상, 주편 사람들의 평가 참조 등에 기초하여 응답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는 내성적인가?”를 자문했다고 해보자.
[5] 사회심리학자 지바 쿤다(Ziva Kunda)의 연구를 비롯하여 우리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두 질문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반문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내성적인가라고 물었을 때 응답이 더 내성적이었다. 질문의 방향이 판단에 영향을 주어서 자신의 성격을 조금씩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질문이 방향의 특정 종류의 증거만을 찾아보도록 하는 프레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개념’도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프레임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질문의 방향과 같은 아주 사소한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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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3를 나가며
감성지능(EQ)과 사회지능(SQ) 개념이 전통적인 지능(IQ)에 반기를 들고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흥분했던 이유는, 새로 등장한 개념들이 기존의 단순한 똑똑함보다는 지혜로움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삶의 문제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감성지능과 사회지능 이 두 개념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애매함은 삶의 법칙이지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감각적 경험과 개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판단들도 프레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애매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한마디로 프레임은 우리에게 ‘애매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