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01_행복한 삶
우리가 추구하는 많은 좋은 것 중에 행복처럼 갈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행복에 대한 경계는 진화론적 관점을 만나면서 절정에 이른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진화심리학은 주장한다.
삶에 대한 만족 자체가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고 삶의 고요를 경험하는 상태가 행복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들이 마치 서로 다른 것인 양 생각하고 행복을 경계한다.
행동에 대한 이런 경계와 의심은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하나의 정의를 허용하지 않는 다중적이고 애매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의심과 경계는 행복 자체가 의심스럽고 위험한 실체라서가 아니라, 행복을 바라보는 프레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여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한 우리의 프레임부터 점검해야 한다.
1장에서는 행복에 대한 많은 오해와 의심의 근원이 어쩌면 幸福(행복)이라는 한자에서 기인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 것이다. 그리고 오해들과 함께 오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소개할 것이다.
2장에서는 행복과 유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어떤 특성도 유전의 힘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유전의 힘이 작동한다는 것과 유전이 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2장에서는 행복에 대한 유전자 결정론의 한계들을 짚어볼 것이다.
3장에서는 행복 실천법을 소개하고 있다.
Chapter 01_행복의 의미
1. 幸福(행복)이라는 이름이 문제다
우리는 幸福(행복)이라는 이름이 과연 적절한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전에 제시된 행복의 첫 번째 정의는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다. 이 정의는 우연(幸)과 복(福)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행복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1] 30개 국가의 사전을 분석하여 각 나라에서 행복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를 고찰한 한 연구에 따르면, 30개 국가 중 총 24개 국가의 사전에서 행복은 ‘운 좋게 찾아오는 사건이나 조건’이라고 일차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라고 정의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연재해, 질병, 권력자의 횡포를 미리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었던 인간에게 행복이란 고통과 질병이 다반사인 세상에서 우연히 예외적으로 찾아오는 자연의 축복과 건강, 그리고 권력자의 자애일 수밖에 없었다.
[2] 행복의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대린 맥마흔(Darrin M. McMahon)의 분석에 따르면,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행복을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환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행복에 관한 초기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에, 幸福(행복)이라는 한자처럼 행복 경험의 본질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건들의 우연성과 예외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르쳐주지 않는 행복 경험의 실체는 무엇인가?
두 번째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행복이란 자기 삶에 대한 만족과 보람, 그리고 흐뭇한 상태다. 이 정의는 심리학자들이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라고 부르는 행복에 대한 정의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幸福(행복)이라는 단어는 유쾌함과 만족이라는 뜻을 전혀 담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름을 바꿔보면 어떨까? 일본식 한자인 행복이 생기기 전 동양 문화권 사람들이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들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고전 연구자인 박재희 박사가 2012년에 쓴 한 칼럼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3] 남의 시선과 기대에 연연하지 않고 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삶의 자세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만족스럽다. 그 만족의 상태를 自謙(자겸)이라고 한다. 겸은 만족스러운 것이다.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스러운 상태를 바로 快足(쾌족)이라고 한다.
송나라 시대 유학자 주희가 엮은 <大學章句(대학장구)>에 나오는 문장을 해석한 글인데, 여기 등장하는 ‘쾌족’이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기분이 상쾌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심리 상태를 지칭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행복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행복 대신 쾌족이라는 한자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심리적 경험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고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는 이유가 행복이라는 한자의 한계라면,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쾌족이라는 단어를 함께 떠올려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첫걸음은 행복의 조건과 행복 자체를 구분하는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행복 경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쾌족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 행복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쾌족으로 이해하게 되면, 행복한 감정(快(쾌))이란 외따로 존재하는 개별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다양한 감정 모두를 지칭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감사해서도 기분이 좋고 영감을 받아서도 기분이 좋으며 고요하고 평화로워서도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감정의 색깔은 기본적으로 매우 다양하다.
행복을 실제로 측정하는 방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4] 심리학에서 행복한 감정을 측정할 때에는 PANAS(positive and negative affect schedule)라는 도구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다.
PANAS는 일정 기간 동안 개인이 경험한 긍정 감정과 부정 감정의 정도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아래는 PANAS를 구성하는 감정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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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감정 |
부정 감정 |
관심 있는 |
괴로운 |
신나는 |
화난 |
강인한 |
죄책감 드는 |
열정적인 |
겁에 질린 |
자랑스러운 |
적대적인 |
정신이 맑게 깨어 있는 |
짜증 난 |
영감 받은 |
부끄러운 |
단호한 |
두려운 |
집중하는 |
조바심 나는 |
활기찬 |
불안한 |
행복한 감정 상태를 측정하는 감정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행복하다’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불행하다’ 역시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행복한 감정 상태가 행복이라는 개별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상태가 아님을 의미한다.
많은 연구가 우리가 충분히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로 ‘단 하나의 옳은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를 꼽는다. 예를 들어 가능한 행동의 선택지를 극소수로 제한해놓은 문화, 다시 말해 엄격한 행동 규범이 존재하는 문화의 구성원들이 느슨한 문화의 구성원들보다 낮은 행복감을 경험한다. 개인적 자유가 억압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행복한 감정을 경험하기 위해서 ‘행복’이라는 어떤 특수하고 개별적인 감정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경직된 사고가 우리의 행복을 억압했을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쾌족으로 행복을 이해할 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값진 깨달음은 행복이 철저하게 일상적이라는 깨달음이다. 행복이 좋은 기분과 만족, 그 정도라면 그걸 가능케 하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행복은 철저하게 일상적이다.
3. 행복은 가벼운 것이라는 오해
행복이라는 한자는 행복이라는 단일 감정의 존재를 가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은 피상적이고 얕은 감정일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5] 철학자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행복? 그딴 건 영국 놈들이나 추구하는 것이야(Man does not strive for happiness; only the Englishman does that)”라고 행복과 영국 사람을 폄하했을 때, 그가 생각했던 행복은 그런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PANAS에 포함된 몇 가지 긍정 감정을 살펴보면, 우리의 오해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관심있는(interested)
PANAS는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대상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묻는다. ‘나는 행복한가?’ 라는 질문은 ‘나는 무언가에 관심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이 질문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이며 명확하다. 관심 있는 마음 상태는 결코 피상적이거나 얕은 감정 상태가 아니다. 관심은 사랑과 예술과 과학, 그리고 모든 문화적 활동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영감 받은(inspired)
행복한 상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에 잘 등장하지 않는 또 하나의 긍정 정서는 ‘영감’이다. 영감이란 보통의 인간에게서는 쉽게 기대되지 않는 성취나 행동을 목격했을 때 우러나는 고취의 감정이다. 영감의 사전적 정의는 ‘신령스러운 예감이나 느낌’,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이다. 이런 영감의 상태가 행복의 또 다른 요소이다.
감사(gratitude)
경외감(awe)
영감과 사촌 관계에 있는 정서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감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외감이다. 영감, 감사, 경외감 이 세 가지는 자기만의 경계를 벗어나게 하는 초월적 감정들이다. 영감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탁월함을 경험하고, 감사를 통해 자기와 연결된 타인들과 자연 그리고 신을 인식하게 되며, 경외감을 통해 자기보다 더 거대한 존재들을 느끼게 된다.
이 감정들은 우리 안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영원한 것에 눈을 뜨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감정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행복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있으면서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이다.
4. 고통이 없어야 행복이라는 오해
스마일리는 행복을 기원하는 가장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스마일리는 전 세계에 웃음과 행복 전도사 역할을 해온 한편,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행복에 관한 오해를 키워왔다.
행복이 스마일리와 연합되면서, 행복은 항상 즐거운 상태일 것이라는 생각들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행복이 과도한 감정노동과 자기기만을 요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로부터 자기가 소외되는 현상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6] <긍정의 배신(Bright-Sided)>라는 책에서 저자 바버라 애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무조건 행복할 것’을 강요하는 행복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행복, 즉 쾌족의 상태는 고통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감정 경험보다 긍정적인 감정 경험이 더 많을 때를 행복한 상태라고 이야기할 뿐이지, 부정적인 감정 경험이 전혀 없어야만 행복하다고 결코 정의하지 않는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긍정 경험과 부정 경험의 이상적인 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 어떤 학자고 그 비율이 100:0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7] 2005년에 바버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과 마르샬 로사다(Marcial Losada)가 긍정과 부정의 이상적 비율이 대략 3:1(정확히는 2.9013:1)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이후에 이들의 계산이 틀렸음이 밝혀졌다.
중요한 점은, 그 어떤 비율도 부정 정서 경험이 제로인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통에도 듯이 있다’는 말처럼,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행복이 고통의 완벽한 부재 상태일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하게 틀린 생각이다.
이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서 조금 돌아가보려고 한다.
[8] 두 명의 천재적인 심리학자의 삶을 파헤친 <언두잉 프로젝트(Undoing Project)>를 읽는 것은 저자에게 뜻밖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두 명의 위대한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에이머스 트버스키(Amos Tversky)의 평생에 걸친 공동 작업과 그들의 우정을 소개하고 있다.
조국 이스라엘을 떠나 미국에서 유학한 이들이 젊은 시절부터 의기투합하여 오늘날 행동경제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만들어낸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다. 특히 부러운 점은 서로에 대한 신뢰였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갈등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비단 저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가 파헤친 그들의 관계를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의 관계를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에 대한 섭섭함, 시기, 질투, 오해로 얼룩져갔다. UC버클리에 재직하던 카너먼이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긴 이유도 버클리에서 매우 가까운 스탠퍼드 대학에 재직하던 트버스키를 벗어나고자 함이었다는 부분을 읽을 때는 정말로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절망은 저자가 이들에게 가졌던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이었다. 어떤 오류도 없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듯이, 이상적인 관계에는 어떤 갈등도 없어야 한다는 비현실적 기대 역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가끔 다툴 수도 있고 갈등도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다툼과 갈등이 실제로 발생해도 충격을 더 받는 법이다.
이 원리는 행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행복을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늘 즐거운 상태여야 한다고 기대하면 조그만 고통에도 크게 좌절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그런 기대를 갖지 않은 사람보다 역설적으로 더 낮은 행복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 연구팀은 이 가능성을 검증해보고자 했다.
[9]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맥머핸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위의 네 가지 차원에서 제각각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연구팀은 2번에 주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행복이란 고통도, 부정적인 감정도 경험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이 얼마나 동의하는지에 주목했다. 더 나아가 행복에 대해 이런 이상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행복감이 낮은지, 그리고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10] 결과는 우리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우선, 고통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없어야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행복감이 낮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경향성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고통의 완벽한 부재가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들이 즐거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더라도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예상된다면, 그런 일을 애초부터 피하려고 한다는 점도 발견했다.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제한해버리는 꼴이었다.
행복에 관한 연구 분야에 대한 가장 빈번한 비판은, 이 분야가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누구도 행복은 고통의 완벽한 부재 상태이며, 고통은 무조건 부정하고 기피해야할 대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고통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 균형 잡힌 이해를 갖게 되면, 행복이 스마일리처럼 마냥 즐거운 상태라는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5. 행복의 우연성을 허하라
행복이라는 단어가 행복의 조건만 가리킬 뿐 본질에 대해서 눈을 감지만, 이 단어가 마냥 해로운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가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우리는 행복의 우연성을 점점 간과하게 되었다. 행복이 설계되고 기획되고 추구되어야할 대상이 되면서, 우연한 행복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행복은 본질 자체가 자유로움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느슨해야 한다. 행복을 종용하는 것은 행복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행복, 우연한 행복, 심각하지 않은 행복이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11] 그런 면에서 김사인의 시 <조용한 일>은 우연히 발견한 행복을 실감케 한다.
: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 고맙다
: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우연히 발견한 소소한 행복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
행복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쾌족이라는 한자가 더 낫지만, 행복이라는 단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행복의 우연성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다. 정복, 추구, 설계의 대상이 되어버린 행복이 우리에게 주는 중압감을 이겨내기에 ‘幸(행)’이라는 글자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 Chapter 01을 나가며 –
행복은 선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다.
이런 경계와 의심은 행복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幸福(행복)이라는 한자와 관련이 있다. 행복이라는 한자는 행복의 본질이 아닌 조건을 지칭하고 있다.
행복은 가벼우면서도 깊이가 있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려는 자세다. 행복은 단 하나의 감정이 아니다. 삶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다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으로 가슴이 설렌다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