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_방 안의 코끼리 내쫓기
데이브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처음 몇 주 동안, 나는 친구들이 안부를 묻지 않는 데 충격을 받았다.
[1] 그런 일을 처음 겪었을 때는 마치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친구를 상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블로거인 팀 어번은 이렇게 썼다.
“당신이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치자. 그러다 사랑에 빠졌는데 새 애인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눈이 뒤집혀 두 사람을 살해했다 치자. 그렇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그 일에 관해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친구는 당신 삶에 관해 아무것도 결코 절대로 영원히 묻지 않을 것이다.”
떄로 이런 친구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우리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기도 하고,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친구들이 내게 기분이 어떤지, 어떻게 지내는지 뭊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프와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고통스러운 대화를 피하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전에는 건강이 어떤지 제프에게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염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프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데이브를 잃고 나서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피하는 것과 감정을 보호하는 것은 다르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실을 겪은 부모들 역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2] 저자 미치 카모디는 뇌종양으로 아홉 살짜리 아들 켈리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나서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때 우리 아들은 두 번 죽는 겁니다.”라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런 까닭에 미국 최대 애도 조직의 하나인 ‘공감하는 친구 Compassionate Friends’는 세상을 떠난 자녀에 대해 공공연하게 자주 말하라고 가족들을 격려한다.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화제를 피하는 행동은 워낙 흔한 까닭에 이를 가리키는 특정 용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3] 수십년 전 심리학자들은 나쁜 소식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침묵 효과 mum effect’라는 명칭을 붙였다.
[4] 의사들은 예후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환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
관리자들은 지나치게 머뭇거리느라 직원들에게 해고 소식을 제때 알리지 못한다.
우리는 특정 상황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태도로 일관해 가족, 친구, 동료를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다. 일상생활에서도 혼자 생각만 하고 있으면 불쾌한 심정에 빠질 수 있다.
[5] 한 실험에서 여성의 4분의 1과 남성의 3분의 2가 15분 동안 혼자 앉아 생각만 하고 있느니 차라리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받는 쪽을 선택했다.
이렇듯 침묵은 고통을 증가시킨다.
나는 가족과 명 명 되지 않는 친구에게만 데이브의 이야기를 마음 편히 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을 열기 쉽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친구와 동료도 있었다.
[6] 심리학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오프너 opener’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친구들과 달리 오프너는 질문을 많이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대답을 귀담아 듣는다. 이들은 타인에 대해 알아가고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한다. 오프너는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평소에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오프너가 언제나 가장 친한 친구인 것은 아니다.
[7] 역경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을 더욱 잘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8] 작가인 애너 퀸들런은 “진정한 자아의 중심 깊은 곳에 동질의 깊은 틈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슬픔에 관해 터놓고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했다.
[9] 퇴역 군인, 성폭행 피해자, 자녀를 잃은 부모는 비슷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유용한 심리적 지지를 받는다.
상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심지어 매우 친한 친구조차도 나나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주위에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다
애덤은 사람들이 말을 건네고 싶어 하지만 방법을 모를 뿐이라고 확신했다.
세계 어느 문화에나 부정적인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압력이 존재한다.
[10] 중국과 일본에서는 평온하고 침착한 것이 이상적인 감정이라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섢한다.
[11] 심리학자 데이비드 카루소가 주장하듯 “미국 문화에서는 안부를 묻는 질무네 그저 ‘좋아요’ 정도로 대답해서는 안된다. … ‘무지하게 좋아요’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힘들게 지낸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은 ‘거의 부적절’하다. 이면에 존재하는 진짜 감정을 숨기라는 끈질긴 요구가 따르기 때문이다.
[12] 애너 퀸들런은 이 말을 좀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슬픔이 세상에서는 속삭임처럼 들리지만 마음속에서는 함성처럼 메아리친다.”
유대인 전통에서는 배우자가 사망하면 30일 동안 애도한다. 한 달이 거의 끝날 무렵, 나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내 감정을 전달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13] 그동안 감정을 글로 많이 쏟아내기는 했지만 공개하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었다.
하룻밤 고민한 끝내 다음 날 아침, 마음이 변하기 전에 글을 올렸다.
내가 느끼는 공허를 묘사하고, 그 공허에 얼마나 쉽게 빨려들어갔는지 적었다.생전 처음 기도의 힘을 깨달았다고도 썼다. 도저히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몇 주를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얼굴을 맞대고 하기 힘들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지내요?” 같은 일상적 인사를 들으면, 평상시와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고 썼다. 대신 “오늘은 기분이 어때요?”라고 물어주면 내가 상황을 이겨내라고 매일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고 설명했다.
내가 올린 글의 영향은 즉시 나타났다. 친구들, 이웃을, 동료들이 코끼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인 비극을 누구나 마음 편하게 공개적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할지, 언제 어디서 말할지 나름대로 선택을 한다.
[14] 그런데 정신적 외상을 남긴 사건들을 공개했을 때,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친구나 가족들에게 사연을 털어놓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에게 이해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몇몇 친구에게는 내 심정을 직접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모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며 속마음을 말해줘서 고맙다며 내 안부를 물어주기 시작했다.
코끼리를 불러들이는 역경은 죽음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 이혼, 실직, 성폭행, 중독, 투옥, 질병 등 상실을 떠올리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자기 생각이나 사연을 털어놓으면 사회적 결속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몇 명 되지 않는 필리핀 학생이었던 앤서니 오캠포는“공동체에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아메리칸 드림 때문에 받았던 심적 압박감”에 대해 말했다. 그에게는 덧붙여 감내해야 하는 자신만의 고통도 있었다.
[15] 사회학과 교수가 된 앤서니는 이민자 가정에서 자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난 후에 파생되는 문제를 연구했다.
앤서니가 인텁한 10대 필리핀 소년은 “어머니가 내가 마셨던 물 컵이 더럽다며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렸다”라고 했다. 한 이민자 가정의 아들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털어놓자 가족들이 자신을 차에 태워 멕시코 땅에 내려놓으면서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라며 여권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화에서 앤서니는 모순을 보았다. 이민자 부모들은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는 고통을 직접 겪었으면서도 성 소수자 자녀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겼다. 앤서니는 결과를 부모에게 설명했다. “자녀들은 마약, 알코올, 안전하지 않은 성행위를 탐닉하며 인정받으려고 해요. 가족에게 거부당한 기억은 여러 해 동안 사라지지 않으면서 삶의 모든 측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답니다.”
앤서니가 인내심을 가지고 사려 깊게 설득하자 부모도 앤서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용기를 내서 침묵을 깨고 나자 가족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것이다.
작가 에밀리 맥도웰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에밀 리가 임파선 암에 걸렸을 때 경험한 최악의 상황은 항암화학요법을 받아 속이 메슥거리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아니었다.
[16] “가족과 친한 친구들이 많이 멀어져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꼈다.
그들은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의도치 않게 완전히 잘못된 말을 했다.“
[17] 그래서 메일리는 ‘공감대화 카드 empathy card’를 만들었다.
의도가 정말 좋더라도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저자 팀 로렌스는 이렇게 물었다.
[18] “비극적인 일을 당하면 개개 주위 사람들이 사라지고 상투적인 말만 남는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거야’말고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러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가장 유익하고 적절한 행동은 인정하는 것이다. 글0자 그대로 이렇게 말하다. ‘네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가 곁에 있어줄게.’”
고통이라는 코끼리는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코끼리를 무시하면 슬픔을 겪는 사람은 자신을 고립시키고, 위로해줄 수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상대방과의 거리만 넓히고 만다. 두 사람 모두 손을 뻗어야 한다. 공감하면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다. 코끼리가 사라지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나는 알아,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여. 나는 너를 염려하고 있어”라고 말해줄 수는 있다. 물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며 소리쳐 말하는 방식은 제외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