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3_우정의 백금률
[1] 스트레스에 관한 고전적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불편할 정도로 큰 소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울리는 가운데 퍼즐 맞추기처럼 집중력을 요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피험자들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심장 박동 수와 혈압이 증가했다. 그들은 집중하려고 애를 썼지만 실수를 했다. 많은 사람이 크게 좌절하면서 중간에 포기했다.
연구자들은 불안감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일부 피험자들에게 도피 수단을 제공했다. 소음이 너무 불쾌해지면 피험자가 버튼을 눌러 소음을 중단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버튼을 누르면 피험자들이 침착해지면서 실수와 짜증이 줄어들 것이었다. 이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는 피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음을 중단시키는 행위는 스트레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 자신이 소음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영향을 미쳤다.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자 피험자들은 통제감을 갖고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었다.
[2] 누구에게나 고통에 빠졌을 때 누를 수 있는 버튼이 필요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역경을 맞으면 어떻게 버튼을 제시해야 할까? 위기를 겪고 있는 친구를 도와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3]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우리는 대부분 두 가지 다른 감정적 반응을 보인다.
공감함으로써 타인을 도우려고 나서거나, 고민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작가 앨런 러커는 희귀한 질병을 앓아 몸이 갑자기 마비되는 증상을 겪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보이는 두 가지 반응을 목격하고 이렇게 썼다.
[4] “몇몇 친구들은 샌드위치를 사다 주거나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갖다주거나 빈손으로 와서라도 매일 내 상태를 살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취를 감췄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내가 처한 새로운 상황이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첫 징조였다.
러커의 신체적 마비가 일부 사람들에게 감정적 마비를 유발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상상하기도 힘들다.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강렬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는 고통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피험자들에게 물이 담긴 양동이에 팔을 집어넣게 하고 ‘만약 다섯 시간 동안 냉동실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추측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5] 양동이에 차가운 물이 가득 차 있는 경우에 피험자들이 추측한 고통의 정도는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는 경우보다 14퍼센트 컸다. 하지만 차가운 물에서 팔을 빼고 10분이 지난 후에 추측한 결과는 따뜻한 물에 팔을 담갔던 집단과 같았다. 차가운 물에서 팔을 뺀 지 불과 10분 지났을 뿐인데도 차가울 때의 상태를 기억하지 못했다.
애도하고 위로하는 방법이 한 가지뿐인 것은 아니다. 어떤 방법이 유용한지는 사람과 시기에 따라 다르다. 성장하면서 나는 자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우하라는 황금률을 따르도록 배웠다.
[6] 하지만 누군가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는 황금률을 따르지 말고, 그들이 대우받고 싶어 하는 대로 대우해주라는 백금률을 따라야 한다.
비탄에 잠긴 사람이 보내는 신호를 감지해 그들을 이해하고, 좀 더 바람직하게는 행동으로 반응해야 한다.
저자 브루스 페일러는 “무슨 일이든 해주겠다”라고 제안하는 위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7] “의도가 좋기는 하지만 이는 결국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무심결에 의무를 지운다.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어떤 일’을 하라”라고 페일러는 썼다.
그는 이혼한 뒤에 이사해야 하는 사람에게 포장용품을 보내거나, 집을 잃은 친구에게 결혼 축하 파티를 변형한 형대로 파티를 열어준 사례를 소개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문제를 고치려고 애쓰기보다 문제가 초래한 피해에 마음을 쓰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8] 심리치료사 메건 디바인은 “살다 보면 고칠 수 없는 문제들이 생긴다. 문제는 다만 옮겨질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사소한 행동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
[9] 심리학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설하라고 요청하는 방식으로 10대 소녀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다. 이때 어머니와 손을 잡게 하자 소녀들이 느끼는 불안이 감소했다. 식은땀이 줄어들고, 생리적 스트레스가 어머니에게 옮겨갔다.
누구에게 지지를 얻어야 할까?
[10] 심리학자 수전 실크가 고안한 ‘링 이론 ring theory’을 참고하면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비극적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주위를 둘러싸며 원을 그린다. 그런 다음 더 큰 원을 그리고 사건 때문에 다음으로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위기에 근접한 정도를 기준으로 원을 더 크게 계속 그린다. 실크가 중재 전문가 베리 골드먼과 함께 썼듯 “원을 전부 그리고 나면 푸념하는 순서가 생긴다.”
자신보다 원의 중심에 가까이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바깥쪽 원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구한다. 자신보다 가까이에서 비극을 겪고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좀 더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라는 뜻이다.
슬픔은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모두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퍼한다.
[11] 분노는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쿼블러 로스가 정의해서 유명해진 ‘슬픔의 5단계’ 중 하나에 속한다.
상실에 직면한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현실과 타협하고 우울해하는 네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을 수용한다.
[12] 하지만 요즈음 전문가들은 그러한 과정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다섯 가지 단계가 아니라, 정도가 오르내리는 ‘다섯 가지 상태’라고 본다.
슬픔과 분노는 물을 끼얹은 불길처럼 꺼지지 않고 순간적으로 깜빡이다가 다시 활활 살아난다.
(데이브가 죽었을 때의 상황) 나는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라 괴로웠다. 친구들은 슬퍼하는 나를 위로해주는 동시에 내가 예전에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강도로 강렬하게 뿜어내는 분노를 감당하고 받아내야 했다.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이 단순히 버튼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위로를 받듯이, 내가 주위 사람을 견디기 힘들게 몰아세우더라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확신시켜줄 친구가 필요했다.
“당신은 이 위기를 극복할 거예요”라는 말은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견디기 힘든 순간에 내 곁에 있겠다는 말이 더욱 큰 힘이 되었다.
친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들은 우정의 백금률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손수 보여줬다. 처음에는 그들과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그래야만 나 자신이 될 수 있었고 내가 겪는 고통과 분노를 그들이 흡수해서 해소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점차 내 선택 사항이 되었다. 관계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13] 사람들은 성숙해질수록 의미 있는 관계의 좀 더 세밀한 측면에 집중하고,
[14]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우정의 양보다는 질을 선택한다.
슬픔이 최악의 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나는 우정이 일방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도록 균형을 회복해야 했다.
내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계속 내 상태를 살피고 내 곁에 있어주려고 노력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15] 그래서 데이브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되던 날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모래사장에 찍힌 발자국 Footprints in the sand’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냈다.
원래는 종교 우화지만 우정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신과 함꼐 바닷가를 거니는 꿈을 노래한다. 모래사장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지만 삶이 “괴로움과 슬픔과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인다. 자신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시인은 이렇게 항의한다. “당신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어째서 내 곁에 있어주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하는 자녀야, 한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는 내내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모래사장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힌 것은 내 삶이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내내 친구들이 나를 안고 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내가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았던 것은 친구들이 내가 쓰러지면 부축할 준비를 하고 내 뒤에 바싹 붙어 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