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_나를 바꾸는 프레임
1. 어떤 기도
세실이 랍비에게 가서 물었다. “선생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정색을 하며) 형제여, 그건 절대 안 되네, 기도는 신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그럴 순 없지.”
이번에는 모리스가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담배를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여, 기도에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위의 경우처럼 동일한 행동도 어떻게 프레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삶에서 얻어내는 결과물이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프레임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행복을 결정하는 것
“행복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다. 행복은 대상이 아니라 재능이다.” (헤르만 헤세)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 환경 미화원에게 한 젊은이가 물었다.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 지닌 프레임이다. 지구를 청소하고 있다는 프레임은 단순한 돈벌이나 거리 청소의 프레임보다는 훨씬 상위 수준이고 의미 중심의 프레임이다.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런 의미 중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갖기 쉬운 프레임은 대개 하위 수준이다. ‘당장 먹고 살아야’ ‘귀찮아서’ ‘남들도 안하는데’ 등과 같은 생각은 하위 수준 프레임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상위 수준과 하위 수준 프레임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1] 바로 상위 프레임에서는 ‘Why(왜)’를 묻지만 하위 프레임에서는 ‘How(어떻게)’를 묻는다는 점이다.
상위 프레임은 왜 이 일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의미, 목표를 묻는다. 비전을 묻고 이상을 세운다. 그러나 하위 수준의 프레임에서는 그 일을 하기가 쉬운지 어려운지, 소요시간, 성공 가능성과 같은 구체적인 절차부터 묻는다. 그래서 궁극적 목표나 큰 그림을 놓치고 항상 주변 이슈를 좇느라 에너지를 허비하고 만다.
상위 수준 프레임이야말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이며, 자손에게 물려줘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자녀들이 의미 중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도록 한다면, 거액의 재산을 남겨주지 않아도 험한 세상을 거뜬히 이기고도 남을 만큼 훌륭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과 다름없다.
3.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프레임
“지혜의 핵심은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존 사이먼)
유럽 국가들을 보면 장기기증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 나라마다 장기이식에 필요한 의료 시설이나 경제 수준, 교육 수준, 종교 등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같은 유럽 내에서도 장기기증 비율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 스웨덴의 장기기증 비율은 덴마크, 네덜란드, 영국, 독일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다. 거의 60%이상 차이가 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해답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장기기증 비율이 높은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모든 국민이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된다. 원하는 경우 장기기증을 원치 않는다는 절차를 밟으면 기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장기기증 비율이 낮은 나라는 원할 때 절차를 걸쳐 장기기증자가 된다. 똑같은 선택을 놓고 프레임만 바꾼 것이다.
이 두 가지 정책을 각각 ‘탈퇴하기(opt-out)’와 ‘가입하기(opt-in)’라고 한다. 이 두 정책은 사람들에게 아주 다른 프레임을 유도함으로써 실제 행동에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4. 실패를 부르는 회피 프레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모세는 12명의 사람을 보내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한다. 12명 중 10명의 보고 내용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와는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임을 강조하며 그곳으로 진군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결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가나안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취하는 사람과 안주하는 사람의 프레임 차이를 잘 보여준다.
[3] 성취하는 사람의 프레임은 ‘접근’ 프레임이다. 반면에 안주하는 사람의 프레임은 ‘회피’ 프레임이다. 접근 프레임은 보상에 주목하기 때문에 결과로 얻게 될 보상의 크기에 집중한다. 그러나 회피 프레임은 실패 가능성에 주목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실수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하고, 보상의 크기 보다는 처벌의 크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회피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일로 성공을 거두더라도 흥분하고 감격하기 보다는 안도감부터 경험한다. ‘휴 다행이다’ ‘안하기를 잘했어’ 등이 주된 감정 표현이다.
안락한 지대에서 벗어나 “지도 밖으로 행군‘하는 용기 있는 행동은 오직 접근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만 가능하다.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지만, 안주하는 사람에겐 어설프게 나섰다간 낭패 보기 십상인 위험한 곳으로만 보일 뿐이다.
5. 틀 속에 갇힌 마음
다음 영 단어가 한번씩 차례로 제시된다 생각하고 빠르게 읽어보라.
Macintosh – Mechanism – Michael – Mechanics – Machinery
마지막 단어를 ‘머시너리’로 읽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매키너리’로 읽지는 않았는가? 프레임이 하는 일이 바로 이와 같다. 어떤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그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위 예시는 아주 단기간의 경험으로 형성된 프레임이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형성된 프레임이 이 정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한다면,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 마음의 준비를 불러일으킬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6. 히스토리와 허스토리
페메니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를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Herstory’를 꼽을 것이다. 이 단어는 ‘History’에 항의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물론 히스토리는 His + Story의 합성어가 아니다. 허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은 Histroy라는 단어 자체의 남성 중심성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과 역사가 남성 중심적으로 기록되고 해석되어온 오랜 관행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국내 한 여성 잡지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에게 이처럼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단어가 제공하는 새로운 프레임 때문이었다.
남성 중심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거나 그 프레임에 의문을 제기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껏 자연스럽게 보였던 것들이 거북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물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7. 편견의 실수
1999년 2월 4일, 아프리카 기니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아마두 디알로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4명의 백인 경찰이 쏜 41발의 총탄 중 19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날 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디알로는 바람을 쐬려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백인 경찰에게서 “멈춰! 머리에 손 올려!”라는 느닷없는 명령을 받게 된다. 백인 경찰들은 디알로가 자신들이 쫓고 있던 흑인 강간범이라고 의심했다. 디알로는 갑작스런 명령에 영문도 모른 채 재킷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는 행동을 했고, 경찰들은 이를 권총을 빼려는 행동으로 오인하여 무려 41발이나 되는 총탄을 난사했다.
[4]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디알로가 꺼내려 한 것은 지각이었다. 4명의 백인 경찰은 흑인인 디알로를 본 순간 자신들이 쫓던 강간범과 닮았다고 판단할 정도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정작 그가 꺼내려던 것이 권총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다.
이 사건에 대해 경찰 측 변호인단이 제기한 반론의 주 내용은 디알로 자신이 전투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경찰의 행위는 범죄가 아닌 실수로 인정되어 전원 석방되었다. 이에 디알로 부모는 뉴욕시를 상대로 8,1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국 300만 달러에 양측이 합의하고 고소를 취하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과연 디알로가 백인이었어도 권총을 꺼내는 모습으로 착각했을까? 혹시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범죄와 연결시키는 고정관념의 프레임으로 디알로를 봤기 때문에 지갑과 권총을 혼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 연구가 수행되었고 결과는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인간의 슬픈 자화상을 드러냈다. 백인 대상으로 이루어진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사람이 화면에 튀어나왔을 때 무기를 들고 있으면 ‘발사’ 버튼을, 무기가 아닌 다른 것을 들고있으면 다른 버튼을 누르도록 지시했다. 이때 튀어나온 사람은 백인일수도, 흑인일 수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가능한 빠르게 누르도록 지시했으며, 실수가 있을 수 있다고 사전에 주지시켰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등장인물이 무기를 들고 있을 때 쏘지 않은 ‘실수’는 그 인물이 흑인일 때보다 백인일 때가 더 많았고,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을 때 무기를 든 것으로 착각해서 방아쇠를 당긴 ‘실수’는 그 사람이 백인일 때보다 흑인일 때 더 많았다.
백인 참여자들은 흑인 = 범죄자라는 고정관념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8. 펩시가 코카콜라를 이긴 힘
펩시와 코카콜라 간의 콜라 전쟁에서 펩시를 승리로 이끈 존 스컬리(John Sculy)는 문제 해결 과정에서 프레임의 위력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마케팅의 귀재였다.
[5] 스컬리는 1967년 펩시에 입사하여 1970년 최연소 마케팅 담당 임원이 되었고, 1977년에는 최연소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의 초고속 승진은 흥미롭게도 ‘병’에서 시작된다.
당시 펩시는 코카콜라의 성공이 특유의 병 디자인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었다. 코카콜라 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고 아이콘이었다. 펩시 측은 코카콜라를 이기는 길은 더 세련된 병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프레임하고, 수년간 디자인 개발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스컬 리가 처음 배치된 곳이 새로운 병을 만드는 부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때 스컬리는 펩시가 문제의 본질을 잘못 프레임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세련된 병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펩시를 더 많이 마시게 유도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펩시는 문제의 본질을 다시 프레임하기 시작한다.
[6] 이에 스컬리는 펩시 역사상 최초라고 할 만한 대규모 소비자 조사를 수행했다.
총 350가구를 대상으로 탄산음료 소비패턴을 조사한 결과, 소비자들은 일단 콜라를 집으로 사들고 가면 버리지 않고 다 마신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발견했다.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마신다는 것. 이 점에 착안한 스컬리는 펩시 병을 코카콜라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또한 들고가기 편한 다양한 크기의 패키지 상품들을 내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일 펩시가 문제를 계속해서 ‘병의 디자인’으로 프레임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쾌거였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프레임하지 못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9. 최후통첩 게임
경제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게임’ 상황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곤 한다. 최후통첩 게임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돈을 분배하는 역할을 하며, 한 사람은 분배자의 제안을 수용하거나 거절하는 게임이다. 거절하면 두 사람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어쨌든 결정자의 입장에서는 한 푼 못 받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받는 것이 더 경제적이므로 100 : 0이 아닌 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순전히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경제적인 잣대로만 볼 수는 없다. 때로는 정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만족감이 돈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부당한 분배라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한푼도 못 받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분배자의 제안을 거부하곤 한다. 따라서 분배자로서는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분배를 제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참여자들에게 이 상황을 ‘월스트리트 게임’이라고 이름 붙이면 자기에게 더 유리한 분배를 제안하고, ‘커뮤니티 게임’이라고 이름 붙이면 훨씬 더 공평한 분배를 제안한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의 이름이 서로 다른 프레임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게임의 상황에 대한 프레임이 이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점이다.
[7] 스탠퍼트 대학교의 리 로스(Lee Ross) 교수 연구팀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프레임은 물건에 의해서도 자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연구팀은 실험 참여자들에게 다섯 가지의 물건 사진을 각각 제시하고 그것을 키 순서대로 정렬하게 했다. A 조건에 제시된 것은 비즈니스와 관련된 물건들, 즉 서류 가방, 만년필, 회의실 테이블, 정장, 구두였다. B 조건데 제시된 것은 비즈니스와는 무관한 전기소켓, 연, 칠면조, 고래, 악보 등의 물건들이 제시됐다.
이후 참여자들에게 최후통첩 게임을 하게 했고, 분배자의 역할을 맡게 했다. 자료 분석 결과, B 조건에서 91%가 50:50의 공평한 분배를 제안했다. 그러나 A 조건 참여자들은 불과 33%만이 50:50의 공평한 분배를 제안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쟁 관련 물건에 노출되기만 해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경쟁 프레임을 갖게 되어 가능하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결과가 사진에만 국한될까? 연구팀은 후속 연구에서 실제 물건들에 노출되도록 했다. 결과 B 조건의 참여자들은 100%가 50:50의 분배를 제안했지만, 비즈니스 물건의 A 조건은 겨우 50%만이 50:50의 분배를 제안했다.
주변 물건들이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짓는 프레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물건 선택에 더욱 신중해질 수 박에 없다. 프레임은 단순히 ‘마음먹기’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다.
10. 소유와 경험의 차이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과일 한 접시 그리고 바이올린,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앨버트 아인슈타인)
일상에서 소유의 프레임과 경험(존재)의 프레임이 가장 빈번하게 대비를 이루는 분야는 소비의 영역이다. 같은 물건을 사면서도 경험 프레임을 갖고 구매하는 사람은 그 물건을 통해 맛보게 될 새로운 경험에 주목한다. 그러나 소유 프레임을 갖고 구매한느 사람은 소유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8] 2000년 11월과 12월, 사회심리학자 밴 보벤(Van boven)이 이끄는 연구팀은 20대부터 60대까지 1,200여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주로 가정 경제에 대한 의견 조사였는데, 설문 말미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소유’ 자체를 목적으로 구매했던 물건(옷, 제품)과 ‘경험’을 목적으로 구매했던 물건(티켓, 스키)을 한 가지씩 고르게 했다. 그 다음 두 물건 중 무엇이 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선택하라고 했다.
그 결과 경험을 위한 구매가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사람이 전체 응답자의 57%였고, 소유를 위한 구매가 더 행복하게 해줬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100%가 안되는 이유는 무응답 또는 고르기 어렵다한 응답 때문)
이는 어떤 물건의 구매 행위를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소유 자체를 위해 구매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행복감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다.
‘경험을 위해 구매한 물건’은 대부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것들이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관계의 경험들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현명한 소비자는 소유보다는 경험의 프레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11. 비만 해결책
음식 섭취량을 결정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인 요소는 바로 용기의 크기다.
[9]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폴 로진(Paul Rozin) 교수가 동료들과 수행한 연구는 기본 단위의 크기가 섭취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진 교수팀은 한 회사의 빌딩과 한 아파트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수행했다. 한 회사 로비에 아침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캔디를 두고 사원들이 자유롭게 집어가게 했다. 어느 날은 3g짜리 80개를 놔두었고 다른 날은 12g짜리 20개를 비치했다. 그러고는 오후에 남아 있는 캔디 개수를 조사했다. 만일 사람들이 식욕대로 먹었다면 12g 캔디를 비치했을 때 4배를 더 먹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12g의 캔디가 비치된 날 더 많은 양을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고급 아파트에도 같은 방법의 실험을 진행했다. 초콜릿이 든 용기를 비치하고 거주자들이 오가며 떠먹을 수 있도록 스푼을 놓았다. 결과는 큰 스푼을 비치했을 때 훨씬 많은 초콜릿을 먹었다.
식욕이 식사량을 결정하기보다 그릇의 크기가 식사량을 결정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것은 그릇의 크기가 프레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눈 앞에 제시된 그릇의 크기가 프레임으로 작동하면서 그 양을 ‘표준’이라고 여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10] <누구나 10kg 뺄 수 있다>는 다이어트 책이 있다. ‘누구나’라는 말이 주는 위안과 ‘10kg’이 주는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당시 서울대학교 의대 유태우 교수는 음식의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반만 먹으라고 권한다.
동의하면서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글세 그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반만 먹을 수 있나요?”
‘프레임’이 던져주는 답은 간단하다. 모든 그릇의 크기를 반으로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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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2를 나가며
지혜가 간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지혜는 끊임없는 훈련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혜는 오랜 연륜을 필요로 하지만 교육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11] 그래서 지혜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교수는 학교 교육 과정에 지혜를 가르치는 과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지혜가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오늘날 우리는 많은 분야의 연구 성과들을 통해 마음의 한계에 대해 체계적이고 손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르침의 중심에 프레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