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5_사람인가 상황인가, 인간 행동을 보는 새로운 프레임
1. 행동의 원인, 사람인가 상황인가?
히틀러의 2인자 노릇을 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세기의 재판을 참관했던 독일계 유태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태인으로서 나치의 핍박을 받았고, 그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때문에 그가 쓴 책은 유태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을 수 있지만 아니러니하게도 아렌트의 책은 유태인들에게서 분노로 가득 찬 비난을 받았다.
나치의 반인륜적인 악행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소수의 악인, 소수의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악행’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닌 소수의 악인만이 저지르는 악의 비정상성, 그것이 나치 학살에 대해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프레임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책은 이 프레임에 대한 도전이었다. 아렌트는 유태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을 사이코패스나 괴물로 그려내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냈다. 유태인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비상식적인 주장이었다.
인간의 행동이 ‘내면의 결과’라는 프레임을 갖고 있으면, 나치의 만행은 소수의 악인이 저지른 산물이다. 그러나 행동이 ‘상황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이히만의 행동은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인가, 상황인가?
이 이슈에 대하여 어떤 프레임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의 많은 행동이 달라진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심리학 연구가 밝혀낸 사실은 보통의 사람들은 ‘사람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 프레임’이 언제나 옳다는 과학적 증거는 생각보다 빈약하다. 오히려 사람의 행동은 그가 처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 ‘상황 프레임’을 지지하는 증거가 많다.
‘사람 프레임’에서 ‘상황 프레임’으로의 변화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만큼이나 혁명적이다. 과학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우리의 경험만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지금까지도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이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유발된다는 점도 일상의 경험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상황이 원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는 누구나 예외없이 악을 저지르고 어떤 상황에서는 누구나 선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도 소수이고, 선을 행하는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류의 사람만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사람 프레임이 설득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이 사람 프레임을 지지하더라도 과학적 연구에 기초하여 상황 프레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채 상황 프레임만을 고수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는 계속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2. 평균으로 세상을 보는 프레임
‘사람인가, 상황인가’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과학을 표방하는 심리학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 예외가 있더라도 평균적으로 들어맞는 법칙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예외가 발견될 경우, 규칙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과학은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흡연자가 폐암에 걸린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같은 상황에서 사람마다 행동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곹 사람 프레임이 더 타당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자주 평균으로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외와 우연을 인정해야 한다. 지구가 둥들다고 하지만,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다. 그래도 평균적으로 보면 지구는 둥글다. 사람을 보는 우리의 눈도 그래야 한다.
3. 행동의 원인은 밖에 있다
1964년 3월 27일 <뉴욕타임스>에 대단히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다 실렸다.
“살인 사건을 목격한 38명 중 한 사람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 기사에는 어떻게 그 많은 목격자들 중에서 단 1명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현대사회가 사람들을 회색 인간으로 만든다고 개탄하는 분석이 실렸다. 이때 몇 명의 심리학자들이 전혀 다른 프레임으로 이 사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심리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목격자들의 인간성 상실이 아니라 ‘목격자들이 많았다’는 그 상황 자체였다. 주민들은 자기만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장면을 보고 있다고 인식하였음을 의미한다. 바로 그 점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구경꾼이 많다는 사실, 그 사실이 역설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도움을 주는 행동을 방해한다. 설사 끔찍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기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책임감의 분산도 경험했을 것이다. 이를 ‘방관자 효과(The Bystander effect)’라고 한다.
2014년에 이 사건의 구체적인 사실이 상당부분 왜곡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 미국에서 발간되었다. 예를 들면, 최소 49명의 목격자가 있었으며, 실제로는 피해자를 도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살았던 지역, 뉴욕 전체가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기사는 경찰의 무능과 황색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거짓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 왜곡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과 일련의 후속 연구들이 상황 프레임의 중요성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예를 들어, 목격자들이 즉각 경찰에 알리기보다는 서로에게 일을 떠넘김으로써 골든타임을 놓쳤고, 결국 피해자를 살릴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고 말핬다고 적고 있다.
4. 흰 연기의 비극
[1]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흥미로운 연구 하나가 진행되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설문지를 작성하는 동안 실험자는 용무를 보기 위해 실험실을 떠났다. 참가자들이 설문지를 작성하는 도중 실험실 구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물론 이는 설정이었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참가자들이 얼마나 빨리 이 상황을 실험자에게 알려서 조치를 취하게 하는지’였다.
결과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참가자가 실험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행동이 감소하였다. 혼자 있을 때는 75%의 사람들이 실험자에게 상황을 보고했지만, 다른 두명의 참가자가 있을 경우에는 겨우 38%만이 실험자에게 보고하였다. 그들의 준법정신이 약해서도 아니고 안전의식이 약해서도 아니다. 바로 상황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위급상황에 함께 있다는 점, 바로 그 상황적 변수가 사람들을 위기 상황에서 주저하게 만든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이 실험 장면과 너무 유사하다.
물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안전 매뉴얼, 승무원의 윤리의식, 화제 예방 체계 등과 같은 다양한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으면 우리의 위험 인식이 저하된다는 심리적 기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안전행동을 의도적으로 더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상황 프레임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5. 군중의 힘
군중이라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과 유사한 심리 상태를 경험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평소에는 자제하던 행동을, 심지어 충동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군중 속의 개인이 바로 그런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고층 빌딩이나 다리 위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구경하던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 대규모 군중이 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달라진다. 심지어 뛰어내리라고 소리치는 야수와 같은 모습으로 돌변한다.
[2] 이와 같은 일이 괘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예일대의 만(Mann) 교수는 이 현상이 개인의 본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군중이라는 상황 때문에 발생하는 데 주목하고, 이런 군중을 가리켜 ‘미끼 군중(Baiting crowd)’이라고 불렀다.
개인이 군중이라는 상황 속에서 경험하는 자아 실종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몰아’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군중이라는 거대한 바닷속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침몰하고 마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개인의 내면만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보다는 행동할 당시의 상황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3] 할로윈 날에 이루어진 한 연구에서 집 주인이 사탕 항아리를 미리 준비해놓고 아이들에게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말하고는 일부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몰래카메라를 통해 아이들이 주인 말대로 하나씩만 가져가는지, 그 이상을 가져가는지 관찰했다.
놀랍게도 아이가 혼자 왔을때는 하나씩 집어갔지만, 여럿이 왔을 때는 주인의 말을 어기고 2개 이상의 사탕을 가져갔다!. 아이들의 본성이 악한 것인가? 아니다. 군중이라는 상황이 아이들의 행동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6. 타인, 가장 매력적인 정답
[4] 상황의 힘에 관한 가장 유명한 연구가 1951년 미국 스와츠모어 칼리지 캠퍼스에서 진행되었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에 의해 수행된 이 연구에서 8명의 남학생들이 한 팀이 되었다. 그 중 진자 피험자는 1명이고 나머지 7명은 실험자를 돕는 동조자들이었다.
과제는 선분 길이가 일치하는 카드를 고르는 일이었다. 7명의 동조자들은 2회차까지는 정답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회차에서 이들은 일부러 오답을 정답으로 선택하였다. 이 실험에서 중요한 점은 좌석 배치로, 진짜 피험자는 항상 마지막 좌석에 앉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7명이 오답을 말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애쉬의 실험은 너무 쉬었다. 애쉬는 1명의 피험자만 단독으로 참여하는 통제집단을 두었다. 이 조건에는 다수의 압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피험자 스스로 같은 길이의 선분을 찾아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 조건에서는 99%가 정답을 골랐다.
7명의 동조자가 있던 조건에서는 회차가 거듭할수록 정답률이 감소하여 약 60% 내외에 머물게 된다. 다시 말해, 매 시행에서 약 40% 정도의 피험자들은 눈에 보이는 분명한 정답을 저버리고 다수의 틀린 선택을 따라간다.
개인차도 뚜렷하였다. 단 한번도 다수에 동조하지 않고 12번 모두 정답을 선택한 사람은 25%였다. 뒤집어보면 한 번이라도 다수를 따라간 사람이 무려 75%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매 회차 모두 다수를 따라간, 줏대라곤 전혀없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5%였다.
다수의 사람들은 가끔씩은 자신의 소신을 저버리고 다수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애쉬의 실험은 이후에 여러 형태도 변형되어 반복되었다. 그중 상황의 위력을 보여준 실험을 살펴보자. 한 실험에서는 동조자들 중 1명을 택해 그에게는 다수를 따르지 말고 정답을 고르게끔 한다. 한마디로 피험자에게 ‘자기편’을 한 사람 만들어준 것이다. 그랬더니 정답률이 100% 가깝게 회복되었다. 한 사람의 동지가 피험자에게 소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준 셈이다.
이는 우리가 소신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천성적으로 겁쟁이이거나 소심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그 ‘한 사람’이 없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변형된 조건에서도 역시 동지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사람은 정답을 선택하지 않고 대신에 다수가 택한 오답이 아닌 또 다른 오답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의견이 다르지만, 다수와도 의견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같은 편인, 새로운 의미의 동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도 결과는 동일하게 나타났다!
만일 우리가 사람 프레임만을 사용한다면 다수의의견에 가끔씩 동조하는 보통의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비난하게 된다. 또한 소신을 지키는 소수의 사람들을 발굴하는 것으로 상황으 ㄹ개선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해결책은 집단의 다양성을 보장하여 우리 모두의 소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상황 프레임으로 세상을 볼 때 가능한 일이다.
집단의 다양성은 개성을 보장하고 소신을 키워준다.
[5] 창의성 연구분야의 대가인 시몬손(Simonson)이 일본 사회의 지적, 예술적 성취를 세대별로 분석한 논문에 따르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많았던 세대를 거치고 나면 일본 사회의 창의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한다.
일본인 고유의 내재적 창의성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개방성이 일본 사회의 창의성을 높여준 것이다. 이렇듯 상황의 힘은 개인의 힘보다 클 수 있다.
7. 권위에 대한 위험한 복종
[6] 사람 프레임과 상황 프레임의 대결을 가장 극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린 연구가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유명한 복종 연구다.
그가 고안한 실험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지역 신문에 참여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직업 제한은 없으며, 참여 대가로 4.5달러를 받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또 연구 목적은 사람이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 벌을 주는 것이 효과적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험에 참여하러 온 사람에게 이 실험에는 학습을 하는 학생과 그 학생의 학습 결과에 따라 벌을 주는 교사, 이렇게 두 명이 필요하다고 설명하였다. 학생 역할을 하는 사람은 두 단어 서로 짝지어진 리스트를 외워야 하며, 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는 테스트를 진행하고 틀리면 벌로 학생에게 전기 충격을 가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이 실험도 학생 역할은 하는 참가자는 실험자와 미리 짠 상태였다. 따라서 진짜 피험자는 항상 교사 역할을 맡았다.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은 처음에는 정답을 맞추다가 나중에는 고의로 오답을 선택한다. 전기 충격은 틀릴때마다 15V에서 시작하여 15V씩 최종 450V까지 이르게 되어 있었다.
실험은 현실감을 반영했다. 점점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냈으며, 신음 소리를 내거나 전기 충격이 일정 수준 넘어가면 더 이상 아무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응답하지 않으면 오답으로 간주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교사는 전기 충격 수준을 계속해서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우리가 사람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면, 오직 극소수의 비정상적인 사람만이 450V까지 전기 충격을 주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런 마지막 수준까지 전기 충격을 가한 사람은 무려 67%에 달했다. 이 실험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권위자가 명령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충격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실험은 발표 즉시 많은 논란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밀그램 자신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밀그램의 실험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에 밀그램은 복종률을 결정하는 변수들을 알아내기 위해 약 20여 차례 연구를 더 진행했다. 그러나 기본 메시지는 같았다. 복종률을 크게 결정한 것은 자칫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상황적 변수였지, 사람 변수가 아니었다.
한 실험에서는 실험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면 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단 한명도 450V까지 전기 충격을 주지 않았다. 이는 복종률의 결정적 변수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 실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결과는 전기 충격을 가하는 사람과 단순히 문제를 읽어주고 그 결과를 기록만 하는 사람을 구분하여 한 팀으로 작업하게 한 경우에 발생하였다. 실험 결과, 보조 역할을 한 사람들 중 전기 충격을 가하는 사람을 제지한 경우는 약 10%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90%는 자신의 역할에 묵묵히 충실한 뿐이었다. 나치 캠프에서도 직접 유대인에게 해를 가하는 역할이 아닌 보조 역할을 한 군인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캠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악마라고 규정하는 식의 사람 프레임만으로는 이런 종류의 불행이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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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를 나가며
상황 프레임을 갖게 되면 결코 이전처럼 사람을 볼 수 없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원래 착하기 때문이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원래 악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원래 그런 류의 사람이고, 부자는 우너래 그런 류의 사람이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은 원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사람 프레임에 입각한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의 힘을 직시하게 되면, 나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조금은 더 관대해진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조금 덜 영웅시하게 된다. 쉽고 익숙한 ‘사람 프레임’에서 불편하지만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 프레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