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_CHAPTER 11 : 내일로부터 온 삶의 보고
우리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어떤 미래를 목표로 삼아야 하고 어떤 미래를 피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그토록 실수를 범하는 우리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미래의 일을 결정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습겠지만 바로 물어보는 것이다. 사회적, 언어적 동물로서 인간의 이점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부딪쳐서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수백만년 동안 인류는 발견의 수도를 나누어 감당하고 발견한 것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무지를 극복해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우주선을 타보지 못했고 언어가 진화하는 과정을 개인적으로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위 질문의 해답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누군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와 공유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일종의 대리학습 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사소통을 통해 편한안 소파에서 굳이 일어나지 않고도 세상을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경험을 나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책이 지금까지 제기해온 핵심 문제에 명쾌한 해결책을 제공해준다. 미래에 느낄 감정을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해보았으며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꺼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렇다면 주변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실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용하는 조언이 틀렸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조언은 훌륭하지만 우리가 그 조언을 거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 맞을까? 타인의 틀린 조언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조언도 무시해버리는 것일까? 이제부터 살펴보겠지만, 두 질문의 해답은 모두 YES 이다.
1. 초복제자 Super replicator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 가운데 가장 사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우리 행위 가운데 가장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전자를 퍼뜨리듯, 우리는 마음이 닮은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념을 퍼뜨린다. 물론 이런 시도는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신념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성공적으로 전달되게 하는 결정 인자는 무엇일까?
특정 신념이 잘 전달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특정 유전자가 더 성공적으로 전달되는 원리를 살펴보면 된다. 신념의 전파 또한 같은 원리이다. 특정 신념이 그 신념의 전파를 촉진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신념은 더 많은 사람에게 수용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신념이 성공적으로 전달될 확률을 높여주는 몇가지 속성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정확성이다. 정확한 지식은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되는 힘이 있다.
그러나 부정확한 신념도 꽤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갈 수 있다. 부정확한 시념은 마치 유해한 유전자와 같아서 스스로를 전파하는 초복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전달 수단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 부정확한 신념들도 전달하게 된다. 부정확한 신념이든 정확한 신념이든 의사소통을 증진시킬 수만 있다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만일 어떤 부정확한 신념이 한 사회를 안정된 사회로 만드는 기능을 한다면 그 신념은 계속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 신념이 있는 사람들은 안정된 사회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고, 안정된 사회는 다시 그 신념을 전파시킬 수단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행복에 관한 우리 사회의 신념 중 일부가 이런 성격을 지닌 부정확한 신념이다. 특히 돈에 관한 신념이 그렇다. 수십년간 부와 행복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경제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절대 빈곤 상태에서 중산층에 이르게 하는 동안에는 부가 행복을 증가시키지만, 그 다음부터는 부가 행복을 증가시키는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굶주리고 춥고 아프고 피곤하고 두려움에 떠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면 그 다음부터 돈은 갈수록 쓸모가 없어지는 종이조각과 같다.
음식과 돈을 충분히 얻어 더 이상 그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계속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까? 아담 스미스도 부의 생산이 반드시 개인의 행복 원천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부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가 활성화하려면 사람들이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획득하고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허기가 있어야 한다. 만일 모른 사람이 자신이 현재 소유한 것에 만족한다면, 그 졍제는 점차 소멸되어 결국 정지하고 말 것이다.
이는 심각한 경제문제이긴 하지만 개인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가 아니라 경제 시스템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동기는 무엇일까? 다른 사상가들처럼 스미스도 사람들이 원하는 단 한가지는 행복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부의 생산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경제는 꽃이 피고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잘못된 신념을 붙들고 있는경우에만 그들은 생산하고 획득하고 소비하는 일을 충실히 할것이고 그래야만 경제가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부의 생산이 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 시스템의 필요를 채워주고 안정된 사회의 욕구를 채워주며 안정된 사회는 행복과 부의 관계에 관한 근거없는 생각을 전파시키는 네트워크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개인이 노력할 때만 경제는 성장하는 법인데, 개인은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이 ‘생산과 소비가 개인적 행복의 필수요소’라는 망상에 빠져야만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념은 ‘초 복제자’이다. 신념 전달 네트워크는 그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을 끊임없이 채워넣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녀를 기르고 돈을 벌어들인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네트워크의 매듭으로서, 개인의 논리가 아닌 사회 네트워크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고 자녀를 낳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일로부터 우리가 기대했던 즐거움을 얻지는 못한다.
2. 지문 fingerprints에 대한 신화
나는 지금까지 상상력이 우리 미래 감정을 얼마나 부정확하게 예측하는지 자세하게 기술해왔다.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때로는 없는 정보를 채워넣기도 하고 일부러 어떤 정보를 빠뜨리기도 하며, 미래가 닥쳤을 때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더불어 수많은 경험, 사회의 문화적 지혜도 이러한 상상의 단점을 보완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미래 감정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금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는 자신의 주관적 상태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말을 한다는 저이다. 사실 행복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도 하여금 당시의 주관적인 상태를 말하도록 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만큼은 제대로 말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미래의 어떤 경험을 통해 느낄 감정을 제대로 예측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현재 감정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미래의 우리 감정을 예측하기 위해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감정을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그만 두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의 경험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 분명한 해결책
상상에는 세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는 상상의 과정에서 우리가 없는 정보를 채워넣거나 있는 정보를 빠뜨린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미래 사건의 모든 특징과 결과를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최소한 몇 가지는 빠뜨린다. 문제는 이렇게 빠뜨리는 내용 중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자기 학교 팀이 라이벌 팀과 게임을 하고 난 후 자신의 감정을 예측하게 했던 연구를 기억해보자. 그 게임 결과가 주는 정서적 영향이 지속되는 기간을 과대 예측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미래 경험을 상상하려고 할 때, 이기는 상상만 했고 게임이 끝난 후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게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게임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 간단하다. 그들은 상상하지 말았어야 했다. 실제로 상상한 집단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실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상상하지 못한 집단은 자신이 미래에 느낄 행복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상상의 두 번째 오류는 현재를 미래에 투사하는 경향성이다. 미래를 상상할 때,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때, 상상은 현재로부터 그런 부분을 끌어와 채워넣는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은 감자튀김 몇 개를 먹고 나서 그것을 얼마나 즐겼는지 보고하였다. 다른 참가자 집단에게는 프레츨을 배부르게 먹도록 해서 짭짤한 스낵은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참가자들에게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 예측하게 하였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다음날 그들이 먹을 음식이 감자튀김이라고 이야기해주고, 그것을 먹고나면 기분이 어떨지 예측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다음날 먹을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앞서 말한 보고자들의 기록 가운데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그들에게 보여주었으며 모르는 참가자들은 자신이 그것을 먹을 때 얼마나 즐거울지 예측할 때 상상을 하지 못했고 기록에만 의존해야 했다.
참가자들은 다음 날 다시 실험실에 와서 감자튀김을 먹고 실제 얼마나 즐거운지 보고하였다. 상상집단은 감자튀김을 먹은 후 예측보다 더 즐거워했다. 예측 당시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리집단은 다른 사람의 보고에 의존하여 예측했기 때문에 훨씬 더 정확한 예측을 했다. 중요한 점은 대리집단이 먹게될 음식을 알지 못하면서 얼마나 즐거울지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것이다.
상상의 세 번째 오류는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그 일은 상상할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대리로 사용하는 것이 이 오류도 고쳐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불쾌한 경험을 조작하였다. 상상집단은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패했을 때 자신이 예측했던 것 보다는 기분이 더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이 얻지 못한 것에 대하여 재빨리 그리고 쉽게 합리화할지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분이 매우 나쁠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리 집단은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밖에 의존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해결책을 거부하는 우리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사용하여 자신의 미래 감정을 예측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내일’ 어떻게 느낄지 가장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오늘’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해결책이 이처럼 간단하고 효과적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방식을 탈피하여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기대해 봄직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과학은 지금까지 ‘평균적인 인간’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믿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평균적인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객관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나를 더 낫게 생각하는 이러한 경향성은, 사실 ‘자신이 남과 다르다’라고 믿는, 보다 더 일반적인 경향성의 표출이다. 때로는 남보다 낫고 때로는 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나와 남은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무엇이 스스로를 이렇게 독특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가 스스로를 아는 방식이 특별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직접 경험해도, 다른 사람이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은 그저 추론해낼 뿐이다.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아는 방식과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판단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보려는 동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주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어울려 그 속에 묻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셋째, 우리는 꼭 우리 자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개개인의 독특성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차이점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배경으로 깔려있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의 강도와 빈도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신을 독특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은 감정 영역에서 특히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은 직접 느낄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의 감정은 표정이나 목소리에 근거해 추론해야만 하기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동일한 강도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지 못할 때도 그들은 우리의 감정을 파악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개인이 지니는 다양성과 독특성에 대한 사람들의 강한 믿음이 우리가 타인을 우리 경험의 대리인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주요 요인이다. 다른 사람의 실제 경험을 우리 미래 경험에 대한 대용물로 사용하려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과 우리의 반응이 대략 비슷할거라고 믿어야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감정적 경험이 매우 다양하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대용한다는 것이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결국 다른 사람의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 감정을 예측하는 데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우리가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을 만한 방법을 거부하고 대신, 흠도 많고 오류도 많은 우리의 상상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3. 맺음말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면 경험을 기억해야만 하는데, 기억이란 전혀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훈련을 하고 지도를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현재’를 탈피해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어려움에 존재하는 역설 가운데 하나가 미래의 우리 감정을 정확히 예측하기 위한 정보가 바로 우리 코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주목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여러 상황에서 실제로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고 우리는 자신을 독특한 존재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정서적 경험을 통해 배워야한다는 사실을 종종 거부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