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성_CHAPTER 2 :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
로리 셰플과 레바 셰플은 쌍둥이이면서도 많이 다르다. 이들이 평범하지 않은 점은 태어날 때부터 이마 앞부분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순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겁고 유쾌해하며 낙관적이다.
만약 당신이 이들처럼 살고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결정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들은 현 상태가 유지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행복에 대하여 로리와 레바가 행복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둘을 제외한 우리가 모두가 행복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로리와 레바가 이미 반박한 주장(샴 쌍둥이는 불행하다는 통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로리와 레바의 행복에 대해 내세우는 주장도 일련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얘기인데,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1. 여러 종류의 행복
행복에 관찬 책들은 대부분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시작한다. 이는 처음부터 빠져나오기 힘든 웅덩이를 향해 무작정 나아가는 것과 같아. ‘행복’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무언가를 지칭하기 위해 우리가 편의상 이름붙인 단어 그 이상, 이하고 아니기 때문이다.
뒤죽박죽된 용어들을 살펴보면, 어떤 행복이 진짜 행복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은 행복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상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의 요소로 가장 많이 주목받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행복’이라는 단어는 최소한 세가지 면, 즉 감정적인 행복, 도덕적인 행복, 평가적인 행복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 외계인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행복
감정적인 행복은 너무나도 기초적인 것이라서 오히려 그 의미를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마치 꼬마가 ‘그’가 무슨 뜻이냐고 물을 경우 어떻게 설명할지 모를 때 느껴지는 막연함과 비슷하다. 감정적인 행복은 느낌, 경험, 주관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물리적 실체는 없다.
예를 들어 ‘노란색’이라는 주관적인 경험을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은 노란색이 한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심리적인 상태일 뿐이다. 노란색에 대해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철학자들에 따르면 주관적인 상태는 ‘더 이상 최소화할 수 없는’ 것으로 다른 것을 통해 지칭할 수도 없고 빗대어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주관하는 신경학적 토대를 제시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외계인에게 색깔을 볼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할지라도 그와 노란색이란 경험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적인 행복도 마찬가지다. 여러 상황(행복을 느끼는)에서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은 행복이다. 물론 구체적인 느낌은 다르다. 경험도 서로 다르지만, 모든 것은 행복이라는 척도 어딘가에 위치하는 느낌의 한 형태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보통 비슷한 형태의 신경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 속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이런 현상을 하나의 언어 범주에 묶어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이란 “왜 그런 느낌 알죠?”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적인 행복의 본질은 경험이다. 그것은 오로지 선행되는 사건, 더불어 그 경험과 연관된 또 다른 경험과의 관계 등을 통해서만 대략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그의 저서 인간에 대한 에세이의 약 1/4를 행복에 관해 다루면서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남겼다. “누가 행복을 정의내릴 것이며, 누가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혹은 덜 행복하다고 말할 것인가? 이것이 행복이라고 또는 저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사람은 누구인가?”
감정적인 행복을 언어로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느낌으로 경험해보면 행복이 존재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은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 외에 바라는 모든 것은 대개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즉, 인간 욕구 본질에는 행복에 대한 추구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순수하게 고통이나 아픔을 선호하는 것은 정신병적 증상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모습이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인간 행동에 대한 이론을 행복이란 주제를 중심으로 정립해왔다. 행복의 추구가 빠진 인간에 대한 이론은 이론으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고결한 행복
역사 속의 모든 사상가가 사람이 감정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왜 그 단어의 의미를 놓고 그렇게 많은 혼란이 있었을까? 여기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많은 사람이 행복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배설의 욕구와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에게 욕구가 있지만, 굳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이러한 믿음이 퍼져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의 가상현실 기계에 대한 예를 제시하였다. 이 기계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하는 경험은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기계에 연결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잊게 된다. 노직은 이런 기계의 도움으로 얻는 행복은 결코 행복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누구도 평생 그런 기계에 붙어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말해 감정적 행복은 돼지에게는 충분하지만, 우리 같이 고상하고 복잡한 존재가 추구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만약 당신이 행복을 좇으면서도 단시 느낌만을 추구하는 삶의 허망함을 개탄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면, 어떤 결론을 제시하겠는가? 아마도 ‘행복’은 일반적인 좋은 느낌 보다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좋은 느낌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부끄러움 없이 추구할 수 있는 그런 행복 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행복을 유데모니아라고 불었다. 이 단어를 번역하면 ‘좋은 정신’을 뜻하지만, ‘융성한 인간’ ‘훌륭한 삶’의 뜻에 더 가깝다.
여러 철학자에 따르면 이런 행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의무를 고결하게 수행하는 것에 있다. 2천년 동안 철학자들은 행복을 고결함과 연관지어 규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껴왔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행복은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을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의 이유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가리켜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철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놓으면서까지 몇가지 극단적인 주장들을 고수하려 애써왔다. 예를 들어, 일광욕 하는 나치 전쟁범은 진짜 행복을 느끼지 못하지만, 식인종에게 잡아먹히는 선교사는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렇다. 우리는 행복을 하나의 경험 상태를 일컬을 때 사용하지, 그 경험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느낌이다. 이에 반해 고결함은 행동을 가리키며, 이 행동은 행복의 느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고결함이 그리고 고결함만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 머리로만 이해하는 행복
철학자들이 행복이라는 단어의 도덕적 의미와 감정적 의미를 섞어놓았다면, 심리학자들은 행복에 담긴 감정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를 섞어놓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체적으로 내 삶을 봤을 때,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말했다 하자. 심리학자들은 대체로 그가 행복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간혹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포함하는 일에 대해서도 행복하다는 말을 쓰곤 한다. 기쁜 느낌과 전혀 멀 때조차 그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말을 일종의 관점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지, 아니면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쓰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행복이라는 말이 그것 또는 …에 관하여 등의 단어 뒤에 따라올 때는 말하는 이가 자신의 느낌보다는 어떤 관점을 나타내려고 그 말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행복’이라는 말을 감정적인 행복으로 보지 않는 다면 이 문장을 이해하기 한결 쉽다.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장은 내가 실제로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사람에게 행복감을 줄 수 이쓴ㄴ지, 혹은 주어왔는지 아니면 마땅히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이해를 드러낸다.
2. 행복은 정말 비교 가능한가?
행복이라는 말은 즐거운 또는 기쁜 같은 주관적인 감정 경험에만 사용하고, 그 경험을 유발하는 행동의 도덕성이나 그 경험의 유익함을 판단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고 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이다. 바나나 크림파이 한 조각을 먹을 때의 행복과 코코넛 크림 파이 한 조각을 먹을 때의 행복은 차이가 있을까? 대체 주관적인 감정 경험이 서로 다르거나 같다는 것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판단은 불가능하다. 두 경험이 완전히 같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서투른기억
두 가지 행복이 서로 다른 느낌이 드는지 아닌지를 판정하려면 각각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교하려 애쓰기 보다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해본 한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이 경우에도 두 자기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두 경험 가운데 하나는 이미 겪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만을 현재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경험을 비교할 뿐이다. 물론 기억이 완벽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경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전혀 믿을만하지 못하다.
언어는 우리가 경험했던 것의 중요한 특징을 추출하고 기억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가 가눙에 그것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행복하다’와 같은 단어를 써서 우리의 경험을 압축한다. 이것이 반드시 적절하다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들을 편리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다.
– 눈앞의 것도 놓치는 우리
과거의 기억은 불완전하므로 현재의 경험을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 내용과 비교하는 것은 위험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좀 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해보자. 이는 경험과 경험 사이의 시간 간격을 줄인 뒤 두 경험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한 연구에서 연구진이 참가자들에게 컴퓨터 스크린을 보고 몇 가지 텍스트를 읽어보라고 요구했다. 그 텍스트에는 대문자와 소문자가 번갈아가며 나왔다. 놀랍게도 참가자들은 그들이 텍스트를 읽는 동안 1초에 몇 번 씩 글자 모양이 변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후속 연구에서도 사람들이 이런 ‘시각의 불연속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각의 불연속을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꽤 자신있어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놓치는 것은 미묘한 변화 뿐만이 아니라 아주 극적인 변화까지도 종종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대학 캠퍼스에서 연구진이 학생에게 접근하여 빌딩 위치를 물어보았다. 연구자가 준비한 지도를 함께 보는 동안 커다란 문짝의 양쪽 끝을 잡은 건축기가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학생과 연구자 사이를 무례하게 뚫고 지나가면서 연구자와 자리를 바꾸었으나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러한 실험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과거에 직접 경험한 일들도 때로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까지 불투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현재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는 데 우리가 둔감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현상적 경험이 변화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변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판단을 기억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3. 행복의 언어
로리와 레바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의 다른 행복을 비교해볼 믿을 만한 방법은 없다. 우리가 무슨 근거로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언어–축소 가설’ 이란 한정된 경험만을 해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체 경험의 범위 중 일부만을 지칭하게 되는 경우를 가르킨다. 이 가설에 따르면 로리와 레바가 황홀ᄒᆞ는 극적인 표현을 쓰는 경험은 사실 우리가 다소 기쁘다고 말할 때 느끼는 정도의 경험과 비슷하다.
– 로리와 레바의 착각?
언어–축소 가설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가설은 생일 케이크를 받았을 때 비록 사람들이 그 느낌을 서로 다름 말로 표현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느끼는 것은 모두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에 세상을 조금 덜 복잡하게 만든다. 둘째, 로리와 레바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진정으로 행복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삶보다 우리의 삶이 더 낫다는 우리의 판단이 정당해진다.
그러나 이 가설은 상당히 많은 오점을 안고 있다. 로리와 레바가 풀밭에서 뒹굴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8점 척도를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새앆한다면,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고 그들만이 경험하는 경험 역시 고려해야 한다. 우리 역시 그들의 경험을 해보지 못했으므로 경험 부족 때문에 축소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 연구진이 참가자들에게 퀴스죠 질문을 몇 가지 제시하고 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정답을 맞히게 될지 추정해보도록 요구했다. 한 집단은 질문만 보여주고, 다른 집단은 질문과 정답을 동시에 제시했다. 질문만 제시해준 집단은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정답을 함께 제시받은 집단은 매우 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는 아직 정답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연구가 보여주는 사실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는 그 경험을 하기 이전처럼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로리와 레바가 몇 주 동안 분리되어 지낸 후, 예전의 삶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예전을 모두 기억할 수 있다 하더라도, 최근에 겪은 분리된 경험이 이전의 삶을 평가하는데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나고 나서는 예전에 했던 자신의 말이 빈약한 경험에서 나온 짧은 판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행복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판단 역시 잘못된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돌이킬 수 없는 경험의 힘
로리와 레바가 정말로 한정된 경험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한정된 경험 배경이 그들의 언어적 표현이 나타내는 경험의 범위를 축소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없다고 앞서 말했다. 또 다른 대안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한정된 경험이 경험의 강도를 오히려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8점을 유발하는 사건은 다르지만 8점이 주는 행복의 느낌은 동일할 수 있다. 이를 경험–확장 가설이라고 한다.
우리는 경험–축소 가설과 경험–확장 가설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행복에 관한 어떤 주장도 누군가의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 관점은 핸재의 경험을 평가하기 위한 맥락, 렌즈 혹은 배경 역할을 하는 과거 경험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개인적인 관점이 끼어들지 않은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그 후로는 그 경험을 하기 전처럼 세상을 볼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할 수는 있어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당시의 마음 상태로 그것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맺음말
1916년 5월 15일 아침, 북극 탐험자 어니스트 쉐클턴은 역사상 가장 험난한 모험 중 하나였던 탐사의 마지막 단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탐험선호는 침몰했고, 선원들은 엘러펀트섬에 좌초되었다. 7개월이 지난 뒤, 쉐클턴과 5명의 선원은 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극한의 항해를 보냈고, 남 조지아 섬에 도착한 뒤 그 섬 반대쪽에 있는 고래잡이 정박장에 도달하려는 희망으로 섬을 걸어 횡단하기 시작했다. 쉐클턴은 이렇게 적고 있다.
“~… 흥겹게 항해를 했죠. ~~ 우리는 행복해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다면 파티를 즐기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쉐클턴의 이 말은 진심이었을까? 그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행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남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 말의 진위를 평가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