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고전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을 자율동아리로 운영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과 함께 고전문학뿐 아니라, 청소년소설 등 좋은 책을 함께 읽으며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는다. 산책하듯 책 속의 문장을 거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아리 이름을 <고전산책반>으로 지었다. 우리 동아리 활동의 핵심은 설렁설렁 여유롭게 지내기. 책 속 문장들 속에서 길을 좀 잃으면 어떠한가. 때론 새롭게 만나는 문장과 좋은 글귀를 건져내는 순간,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샛길이 눈 앞에 펼쳐진다. 설렁설렁 산책하듯 가는 길이더라도 혼자라면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동아리 학생들이 나의 길벗이 되어 함께 떠나니 외롭지 않다. 물론 함께 책의 길, 문장의 길을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친구들도 있지만 정말 산책하는 줄 알고 우리 동아리에 들어왔는데 책만 읽는 것에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도 있다. 대체 산책은 언제 하냐며 동아리 시간마다 질문하는 이 친구들을 위해 가끔 날이 좋으면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가 햇살을 받으며 교정을 걷다가 등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다. 이땐 만화책을 허락하기도 한다.
중학생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청소년소설만 읽는 것은 아니다. 때론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 준다. 잔잔한 물결 같은 그 시간 속, 그림책 속 어느 한 장면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인다. 올가을 함께 읽었던 책은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 <긴긴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표지 그림에도 나와 있듯 코뿔소와 펭귄이다. 코뿔소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코끼리들의 격려를 받으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서투르지만 바깥세상에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며 아내를 만나고 예쁜 딸도 생긴다. 행복했던 이 가족의 완벽했던 어느 날 저녁, 인간들의 욕심에 짓밟혀 모든 것을 잃는다. 노든은 아내와 딸의 죽음에서 자기만 살아남은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던 인간을, 그리고 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고통스러운 삶도 삶이기에 살아지는 법. 그 후 노든은 동물원에 갇혀 복수를 결심하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 앙가부와 함께 탈출을 준비하지만, 절친 앙가부마저 뿔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친구의 죽음과 전쟁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노든 앞에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이는 까칠한 펭귄 치쿠가 나타난다. 노든은 알이 든 자그마한 양동이를 입에 문 치쿠와 함께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 둘의 걸음에는 고통이, 슬픔과 분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붙잡아야만 하는 희망과 오늘이 있다.1)
1)”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속에서_<긴긴밤> 심사평 140p
루리 작가의 글과 함께 망고 색깔의 노을 진 풍경, 별빛 가득한 푸른 밤하늘 등 따스한 색감의 삽화 그림 덕분에 이 책 <긴긴밤>의 주인공 코뿔소 노든의 삶은 우리 학생들에게도 깊이 스며들었다. 다음은 이 책을 함께 읽었던 고전산책반 동아리 학생이 쓴 서평의 일부분이다.
위 학생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긴긴밤>에서는 코뿔소와 펭귄의 여정을 통해 용서와 자립, 그리고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는 아름다운 연대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인 코뿔소 노든의 아픔과 삶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어렵게만 생각했던 ‘용서하기’에 대한 팁을 얻을 수 있다. ‘용서(Forgiveness)’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풀어 보면 ‘누군가를 위하여(for), 주는 것(giveness)’이다. 고통과 분노에 휩싸여 악몽을 꾸고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던 노든은 치쿠가 남겨놓은 알에서 부화한 어린 펭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다.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 <긴긴밤> 81p”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앞날의 두려움을 느끼는 어린 펭귄을 위해 노든은 그 긴긴밤마다 사랑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린 펭귄이 얼마나 사랑받았던 존재인지 상기시켜준다. :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바다를 향해 가는 걸음걸음 동안 어린 펭귄과 함께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보고 감탄하며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과정에서 노든 스스로가 ‘용서’를 실천하고 있음을, 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있던 고통과 분노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스탠포드 대학교의 프레드 러스킨은 오랜 기간에 걸쳐 용서를 연구했다. 그는 용서에 대한 오해가 용서를 더 어렵게 만든다고 하면서 ‘용서’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위해 화를 억누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마음속 미움과 상처를 지우는 과정이며 설혹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삶이 허락해주지 않았을 때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재정의한다. 이렇듯 ‘용서(Forgiveness)’는 가해자를 위하기 이전에,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for) 주는 것(giveness)’이다. 프레드 러스킨 교수의 <용서 프로젝트>에서는 용서하기를 위한 세 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선(善)에 주목할 것.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좋은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 등의 활동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스트레스를 관리할 것. 가장 쉽게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호흡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면서 의식적으로 깊게 호흡해 보자. 그 숨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좋은 생각을 하면 스트레스에서 멀어질 수 있다. 셋째, 관점을 바꿀 것. 나에게 있는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춰 바라보며 불만을 하기보다는 성장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경험에 집중해 보자. <긴긴밤>의 코뿔소 노든과 어린 펭귄처럼.
우리 삶은 완벽하지 않다. 내 선택이 아니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고통과 불행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 책 <긴긴밤>에서 찾은 ‘용서하기’ 위한 3가지 팁 속에 그 답이 있다. 그것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선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접하고 그 에너지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경험으로 채워보자. 이를 실천하다 보면 용서뿐 아니라 긴긴밤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우리의 행복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글: 오란주 (오산중학교 교사, 행복연구회 회장)